2024년 12월 어느 날의 글쓰기
2024년 12월14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대통령의 정당한 권한 행사’, ‘고도의 통치행위’라고 주장해 오던 윤 대통령의 모든 직무가 정지되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주 열차가 일단은 멈췄다. 이제야 안도의 숨을 내뱉는다.
일기장에서 지난 십여 일의 일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읽어 보았다. 분노와 불안과 무력감으로 잠 못 들던 날들이 펼쳐졌다. ‘시간이 거꾸로 가도 한참을 거꾸로 간 것 같다’는 소회부터 ‘일상이 이렇게나 쉽게 깨어지는 연약한 것’이었다는 깨우침, 계엄의 시기를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이기에 내면화되진 않았던 ‘역사적 트라우마(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서 인용)’가 새로이 생길 지경이라는 호소까지, 그날그날의 심정이 거기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실제로 나는 집 근처 성남비행장에서 헬기와 전투기가 뜨는 소리를 환청으로 들을 지경이었으니 가히 ‘트라우마’라 부를만하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전 국회의사당 앞에서 ‘투표불성립’이 선언되었던 순간 갑자기 매서운 추위를 체감했던 일도 적혀 있었다.
내친김에 12월3일 이전의 일기도 살펴보았다. 그 속엔 친구의 늦은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나눈 즐거운 수다, 평일 낮에 독립영화관에서 홀로 보았던 영화에 대한 감상평, 첫눈과 함께 꽃망울을 터트린 거실 화초에 대한 소소한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하는, 일상처럼 해오던 일들에 대한 기록도 보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이후의 일기에선 모두 증발해 버린 이야기다.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들 같았다.
확연히 구분되는 이전과 이후의 일기를 되짚어보며, 다시금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그 사태로 인해 모조리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구나, 하는 씁쓸한 인식이 몰려왔다. 그래서 책을 펼쳐도, 글을 쓰려고 앉아도 허허로운 기분만 들고 아무 진척이 없었던 거였을까. 아마도 많은 국민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대다수 시민의 바람대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금도 불안은 조금 가셨는지 몰라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는 데 있다. 어쩐지 일상의 질감이 살짝 달라진 느낌이다. 평범하게 맞이하는 아침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다른 어두운 각본의 현실이 자꾸만 눈앞에 그려진다. 연말의 분위기를 즐기다가도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새로운 소식을 접할 때마다 미래의 전망이 비관과 낙관 사이를 거칠게 오간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비애가 시시때때로 고개를 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어리석은 한 인간이 저질러놓은 난장판에 휩쓸린 채 우리의 귀중한 하루하루를 어둠에 잠식되게 놓아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애써 생각해 본 게 믿음이다. 막연한 낙관이라고 비판할지 몰라도 결국에 역사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는 믿음이라고 할까. 중국의 소설가이자 산문가인 샤리쥔이 중국의 역사적 인물에 관해 쓴 <시간의 압력>(글항아리, 2021)이라는 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다른 사람을 압박하는 데에 익숙했던 체제나 개인에게는 그 압박의 방식이 조만간 더욱 무정한 방식으로 자기 머리에 가해지기 마련이다.’, ‘권력을 어둠 속으로 힘껏 조종하는 사람은 햇빛을 누릴 운명에 어울리지 않는다.’ 방탕하고 무능력한 황제 ‘호해’와 간신의 대명사 ‘조고’에 대한 글이었다. 조고는 자신의 권세를 시험하고자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겼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와 관련된 인물이다. 윤석열을 비호하는 세력들의 말 같지 않은 말들이 떠오른다. 각설하고, 이처럼 당장의 혼란은 어쩔 수 없더라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는 역사적 섭리에 기대면 마음의 안정을 조금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은 국회의사당 앞 거리를 가득 메웠던 다음 세대로도 이어진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질 때, 힘껏 응원봉을 흔들던 청년 세대들. 공동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전국 대학생 총궐기 집회를 개최하며 목소리를 모았던 전국 대학 총학생회의 청춘들. 역사의 고비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앞장서서 투쟁했던 이들이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면, 지금의 청년들도 앞으로 그들의 몫을 하리라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
8년 전 촛불 시위를 통해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민적 성취를 거두었음에도 또다시 어두운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것에 허망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역사가 반복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아직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달라진 집회 문화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촛불’이 ‘응원봉’으로 바뀌고 ‘민중가요’ 대신 ‘K팝’이 울려 퍼졌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 다른 아이돌 가수를 응원하는 팬이지만 한목소리를 내야 할 때를 안다는 점, 어떠한 정당이나 정치적 세력이 이 집회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깃발을 들고 나왔다는 점과 같은 미세한 변화에서 희망을 보았다면 과도한 낙관일까.
자유민주주의를 디폴트 값으로 알고 살아온 그들이라면 시대를 거스르는 이념 논쟁이 통할 리 없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지켜보면서 ‘텍스트힙’이든 밈이든 어떤 계기로라도 그녀의 작품을 읽은 그들이라면 현 상황의 아이러니를 모를 리 없다. 그러니 보수를 혁신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정당 싸움을 정당한 견제로 돌려놓고, 폭력을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그들은 우리보다 더 잘 해낼지도 모른다. 극단적 신념으로 나라를 분열시키는 윗세대들은 뒤로 물러나고 젊은 그들에게 미래를 맡긴다면 사회가 달라지지 않을까?
탄핵안 가결은 시작에 불과하다. 한동안 우리나라는 극심한 혼란을 겪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그러나 참혹한 폭력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에 주목했던 한강 작가의 작품세계처럼, 나도 비관적 전망보다는 역사의 심판과 청년 세대를 향한 믿음에 기대 보려 한다. 다시 만난 세계는 분명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래야만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