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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May 22. 2020

우울한 몽상가가 건네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

E.T.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 대로 보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거기에 멋대로 상상을 덧칠해 자신만의 비현실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본 것이 환상이 아니고 ‘현실’ 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혼란과 분열을 겪는 인물의 이야기에 몰두한 작가가 있다바로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환상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E.T.A. 호프만(1776-1822)이다.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다소 낯설지만, 널리 사랑받는 차이콥스키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원작이 그의 소설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오페라 <운디네>를 작곡한 작곡가이며 지휘자, 음악감독, 화가, 법률가 등 다방면에서 두드러진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


친애하는 독자여! 
다른 모든 것을 몰아내고 그대의 마음, 감각, 생각을 완전히 사로잡는
무언가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p.30)

  

프랑스 비평가 츠베탕 토도로프는 환상 문학의 ‘환상’을 자연법칙만을 알고 있는 한 존재가 겉보기에 초자연적인 사건에 직면하여 경험하는 망설임으로 정의한다. 즉, 감각적으로 경험한 것을 현실로 인식하는데 주저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호프만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종종 어떤 낯선 형상의 신비와 경이로움에 매료되어 현실과 환영을 분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 파멸한다. 이러한 그의 몽환적인 세계와 상상력은 후대의 작가들 - 도스토옙스키, 고골,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 등- 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고전 중의 고전인 호프만의 환상적인 문학세계를 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의 <<모래 사나이(문학과 지성사, 2020)>>를 통해 처음 만났다.     




<<모래 사나이>>에는 호프만의 단편소설 <모래 사나이>, <적막한 집>, <장자 상속> 세 편이 실려있다. 소설이 주는 전반적인 인상은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하면서 동시에 아름답다. 소설이지만 시적이고 이미지적이다. 영화에서 예를 찾아본다면 팀 버튼 감독의 영화(‘가위손’)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판의 미로’)를 연상케 한다. 꿈은 꿈이되 악몽에 더 가깝고 (소설 속에서도 자주 언급되듯이) 우울한 몽상가가 건네는 이야기 같다     


소설 속 주인공이 겪는 사건의 양상은 어둡고 불길한 예감 – 환영과 몽상 – 혼돈과 분열 – 광기 – 파멸과 죽음/치유와 구원이다. 작가는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전개를 나름의 개연성을 부여해 마술처럼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리고는 실제 세계와 몽상 사이를 오가면서 독자의 흥미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결말에 다다르면 얼마간 허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이야기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한다.    


<모래 사나이> 독일어판 표지

 

세 편의 단편 중에는 맨 처음에 실려있는 <모래 사나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호프만의 대표작이기도 하지만, 소설의 형식과 소재전개가 모두 낯설고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 나타나엘과 로타르, 클라라가 주고받은 세 통의 편지로 시작되는 도입부가 인상적이었다. 편지를 통해 나타나엘이 고백하듯 전하는 이 모든 사건의 근원 - 유년 시절 유모에게 들은 ‘모래 사나이’ 전설은 섬뜩하다. 


어린아이의 상상력은 모래 사나이에 대한 두려움과 환영을 키운다. 나타나엘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늙은 변호사 코펠리우스를 모래 사나이와 동일시하게 되고, 성인이 되어서도 코펠리우스와 이름이 비슷한 청우계 장수 코폴라를 같은 존재로 바라보는 등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타나엘의 연인 클라라가 그들은 ‘내면에만 존재하는 환영’이라고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득해보아도 소용이 없다.     


당신이 그의 존재를 믿는 한,
그는 존재하고 활동하는 거예요. 당신의 믿음이 바로 그의 힘이에요. (p.36) 

    

나타나엘에게 모래 사나이, 코펠리우스, 코폴라는 하나의 악마다. 눈에 모래를 뿌려 현실을 가리고 망원경(가짜 눈)에 맺힌 신비스러운 허상을 좇게 만드는, 두려운 동시에 유혹적인 존재다.     


소설은 중간에 작가의 전지적 시점으로 바뀌면서, 나타나엘이 광기로 치닫게 되는 과정의 심리를 자세히 묘사한다. 그가 마술에 홀리듯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올림피아다. 아름답지만 이상하게 규칙적인 걸음걸이와 빛이 없는 시선, 죽음의 냉기가 감도는 그녀는, 놀랍게도 ‘자동인형’으로 밝혀진다. 


오늘날의 인공지능 로봇이 떠오르며 시대를 뛰어넘는 호프만의 SF적인 상상력에 감탄했다. 마치 올림피아가 영화 <엑스 마키나(알렉스 가랜드 감독, 2015)> 속에서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는 미모의 AI 로봇 같다는 생각도 했다.     


영화 <엑스 마키나(알렉스 가랜드 감독, 2015)> 이미지


불의 동그라미여, 돌아라!
불의 동그라미여, 돌아라! 
(...) 그래! 아름다운 눈이야, 아름다운 눈이야(p.67-68)  


결국, 나타나엘은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환상의 유혹에 저항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 장면에 예기치 않게 등장하는 코펠리우스와 그의 예언적인 발언은 마지막까지 독자를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망설이게 만든다서늘하고 오싹한 결말이다. 호프만은 그의 소설의 디스토피아적인 결말에 대해 작중 화자의 목소리로 이렇게 변명한다.   

  

오, 나의 독자여! 그러면 그대는 현실의 삶보다 더 기이하고 광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가는 현실의 삶을 흐린 거울의 어두운 영상처럼 묘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p.32-33) 

    

거울에 비친 상은 현실을 왜곡한다. 우리 눈을 통해 망막에 맺힌 이미지도 어쩌면 실제와 다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소설을 다 읽은 시점에서 다시 질문해본다. “내가 본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모래 사나이>의  표지 _ '어둠 속에 반짝이는 스노우볼이 아름다운 환상에 갇힌 비극적인 주인공을 상상하게 한다'

*『문학과 지성사』의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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