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미 Aug 09. 2020

보라, 여기 더 나은 미래가 있다

N.K. 제미신의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쥘 베른, 필립 K 딕, 커트 보니것, 어슐러 르 귄, 테드 창 등 굵직굵직한 작가들. 인공지능, 특이점, 우주 개척 시대, 시간여행, 평행세계, 외계인, 바이러스 등 이제 더는 참신함을 기대하기 힘든 소재들. SF 장르에 아직 더 개척할 땅이 남아있을까     



 

여기 누구의 상상도 가닿지 않은 SF 미개척지를 탐사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작가가 있다. 흑인 여성 SF 소설가 N.K. 제미신이다N.K 제미신은 <부서진 대지> 시리즈로 3년 연속 휴고 장편상을 수상한 이 시대 주목받는 SF 판타지 작가 중 한 명이다. 이 책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황금가지, 2020)는 그녀가 2004년부터 2017년 사이에 쓴 22편의 작품이 실린 SF 단편집이다. 그녀는 서문에서 이 책을 자신이 작가로서그리고 운동가로서 성장한 과정을 기록한 연대기(p.12)’라고 말한다. 왜 하필 운동가일까? 그녀가 개척한 SF 불모지는 무엇일까?     


사실주의 문학과 마찬가지로 SF 장르에서도 지금까지 백인 남성 중심의 서사가 압도적이었다. 미래의 소설이라는 SF에서조차 차별이라는 과거의 악습이 반복됨을 알게 된 제미신은 그때부터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제미신은 여성이자 유색인으로서 기존 SF 너머의 글쓰기즉 ‘SF 새롭게 쓰기를 탐사했고 SF 소설계에서 전혀 다른 좌표에 도달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의 22편의 이야기가 수렴하는 한 점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투쟁이라고 느꼈다. 차별과 배제, 혐오에 맞서 저항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서사의 동력이다.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SF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며, 유토피아를 향한 충동 뒤에는 누군가의 고통이 감춰져 있다.
- SF 작가, 조애나 러스 -




첫 번째 단편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은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제미신의 모방이자 반응인 작품이다. 발음상 오멜라스를 연상시키는 움-헬라트 도시는 다양성(p.22)’이 인정되는 유토피아 같은 곳이다. 이 도시의 유일한 범죄는 움-헬라트와 평행 우주인 지금 우리의 세계에서 수집된 차별과 경멸의 정보들을 공유하는 것. 그러나 도시의 통제를 위한 희생양에 대한 태도는 두 소설이 사뭇 다르다. 침묵하며 떠나는 오멜라스의 사람들과 달리 이 소설은 희생자의 아이를 위해 싸우자는 제안으로 끝맺는다.     


“그러니 떠나지 말게. (...) 자네도 그 아이를 위해 싸워야 하네. 그 아이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 내 손을 잡아. 부탁이니.” (p.32)     


독특하게도 1960년대 과거로 돌아간 소설 붉은 흙의 마녀에서는 인종 차별과 그에 대한 저항의식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흑인들은 이를 앙다물고 턱을 치켜들고 있었는데, 백인들이 주위에 있는 상황에서 그런 표정을 짓는다면, 항상 말썽이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왜냐, 백인들은 자부심을 보기 싫어하니까.” (p.66)   

  

딸을 지키기 위해 하얀 족속의 요정과 맞서는 주인공은 불가능한 가능성(p.87)’을 꿈꾼다. 꿈속에서 자유를 얻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흑인 시위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끝엔 백인 아이들과 흑인 아이들이 학교에 나란히 앉아 있다. 갈색 얼굴의 사람들이 우주에도 가고 법원에도 있고 심지어 백악관에도 있다.   

  

“하지만 엄마, 꿈에서 그걸 봤다니까요. (...) 흑인 남자가 커다랗고 하얀 집에 사는 걸 봤어요.” (p.83)  


그 밖에도 위대한 도시의 탄생폐수 엔진용구름이 뜬 하늘 등의 소설 속에도 흑인이 주인공이다. 제미신은 ‘내가 쓰는 소설에서 나 자신을 제외시킬 수는 없어서(p.11)’ 흑인 캐릭터를 작품에 넣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도시의 산파이고 아이티 공화국의 첩자이고 대탈출 이후 지구에 남은 자로서 하나같이 도전적이고 매력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이다.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에 실린 22편의 이야기들은 작가의 정체성과 현실을 반영하여 다소 무거운 주제 의식이 특징이지만, 그렇다고 SF 소설이 갖는 묘미인 지적 경험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를 상쇄시키지 않는다. 탄생하고 뒤집히고 파괴되고 무한 확장하는 22가지의 다채로운 세계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단편 트로이 소녀는 인간이 창조한 사이버 세계인 아모프에서 살아가는 정체불명의 의식 있는 존재들이 주인공이다. 마치 사이버 아바타나 프로그램 같은 이들 앞에 갑자기 한 소녀가 출현하고 소녀로부터 ‘꿈꾸는 능력(p.218)’을 인스톨 받은 주인공은 이제 인간과 동등한 존재, 자유로운 존재를 꿈꾼다.     

 

“그들은 변변치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기계 속의 유령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서 인간들을 마주할 것이다. 그들은 살고, 사랑하고, 강해지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p.219)     


졸업생 대표는 특이점이 도래한 후 인공지능과의 전쟁에서 싸워 패배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파이어월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이들은 매년 어린이 공물을 바쳐야 한다. 도태라는 측면에서 성적이 낮은 10%와 가장 우수하고 총명한 졸업생 대표 한 명. 뛰어난 학생에겐 시스템에 순응하고 평범해지라는 강요가 계속된다. 

     

“왜 넌 다르니? 왜 넌 우리처럼 되려고 더 노력하지 않니? (...) 너희 가운데 누구도 내가 나 자신이 되도록 두지 않으니까.” (p.241)     


어느 날 갑자기 이전의 우주가 사라지고 똑같은 현실이 반복되는 프롤리프’ 이후의 세계를 그린 소설도 있다. 단편 너무 많은 어제들충분치 못한 내일들에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현실의 파편에 존재하면서 온라인상으로만 연결될 수 있다. ‘현실의 뒤집기(p.489)’가 일어나면 온라인에 게시된 글과 그들의 정신만 유지되고 모든 것은 리셋된다. 연결이 강해지면 결어긋남이 일어나며 붕괴하는 세상. 이메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헬렌과 샙은 그렇게 정적 속으로 사라진다.     


“출구일까, 끝일까? 샙이 보러 갔어. 나도 가.” 그녀는 “게시”를 눌렀고, 현실은 정적 속으로 포개어졌다. (p.503)     


재밌게도 요리가 소재인 단편들도 있다. 연금술사는 작은 시골 여관에서 일하는 퇴락한 셰프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한 신사가 기묘한 식재료와 레시피를 내밀면서 시작된다. 도전을 받아들인 그녀는 불새로 불로장생의 요리를 만든다. 퀴진 드 메므아에는 ‘모든 사건의 모든 식사(p.353)’를 모토로 하는 레스토랑이 등장한다. 위치와 날짜 등 정보를 알려주면 추억의 식사를 그대로 재연해주는 환상적인 식당이다.     


이번 단편집에는 작가 제미신이 장편 소설을 시험 주행해 보기 위해 쓴 ‘개념 증명’ 단편들도 포함되어 있다. 스톤 헝거와 수면 마법사는 장편 ‘부서진 대지’ 시리즈와 ‘위대한 도시들’ 시리즈의 바탕이 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인류의 소멸 후 뉴욕을 배회하는 신과 정령들을 그린 렉스 강가에서와 허리케인이 닥친 도시에 괴물의 형태로 나타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혐오’와 싸우는 이들을 그린 잔잔한 물 아래 도시의 죄인들성자들용들그리고 혼령들도 인상적이다. 




SF 소설은 있을 법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 과학기술에 대한 배경 지식과 작가의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어쩌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인간에 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SF의 거장 어슐러 르 귄은 전미도서상을 수상하고 이렇게 말했다. “다가올 시대에는 현재의 삶에 대한 대안을 볼 줄 알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법을 탐구하며, 진실한 희망을 상상하는 작가들의 목소리를 원하게 될 것이다... 더 큰 현실을 말하는 리얼리스트들을." N.K. 제미신은 그런 의미에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투쟁하는 리얼리스트다.     


SF 소설이 창조한 세계에 푹 빠져 있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인다. 인류의 성장 방향을 고민하게 되고 과학기술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된다. 미래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꿈꾸게 되고 인간다움을 깊이 성찰하게 된다. 코로나 19와 기후 이변으로 인해 인간 생존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요즘, SF를 통해 다채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점쳐보며 생각의 지평을 넓혀 보면 어떨까?     


그러니 보시라. 저기 미래가 있다. 모두 함께 출발하자. (p.13)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_ N.K. 제미신




*「황금가지」 출판사의 서평단에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쓴 서평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이 사라진 백 년, 그 혼돈의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