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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l 28. 2020

죽음이 사라진 백 년,
그 혼돈의 시간

김성중의 <이슬라>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사라진다면?     


‘죽음이 사라진 세계’를 그린 소설이 있다. 인간의 오랜 염원 ‘불로장생’이 실현되면, 우리 앞엔 과연 유토피아가 펼쳐질까?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는 시간. 무엇인가 명백하게 어긋난 시간. (p.11)   


김성중의 소설 <이슬라>(현대문학, 2018)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죽음이 사라진 백 년 동안의 인간 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재앙으로 그려낸다. 주인공 ‘나’는 열다섯의 나이에 시간이 멈췄지만, 임종을 앞둔 그의 할아버지는 죽기 직전의 상태로, 임산부인 그의 고모는 임산부인 채로 백 년의 세월을 살아야 한다. 죽음 없는 삶은 인간에게서 성장도, 미래도, 구원도 함께 앗아갔고 갑작스럽게 영생을 얻은 인간들은 타락과 권태, 절망의 늪에 빠진다.      


죽음이 없는 곳에서 인간은 유령에 불과하다는 것. 죽음이 있기에 역순으로 삶의 의미가 생겨났고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일’ 같은 커다란 꿈을 품게 된다. 가장 굵은 나이테로 내 몸에 남아 있는 열다섯이 그렇게 알려주었다. (p.17)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양상을 드러낸다. 죽음의 안식을 갈구하며 광기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술과 마약, 쾌락에 빠져 나태한 삶을 사는 사람들, 급속도로 무기력해져 유사 죽음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미친 세상과 고립되어 노동과 공부를 통해 어떻게든 삶을 지속하려 노력하지만, 이조차도 백 년의 시간을 버티기가 쉽지 않다. 소멸의 질서가 사라진 세상은 인류에게 재난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인간은 먹고 자고 죽지 않는다고 해도 절대로 삶에 만족하지 않아.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의미 있는 일과 연결되어 있고 무언가 역할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거든. 그게 이 인간짐승의 흥미로운 점이지. (p.91)   




백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죽음이 돌아왔다 

    

소설 속에서 현재의 ‘나’는 84세다. 햇수로 치면 184세가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마치 ‘액자소설(p.71)’처럼 그의 인생은 시간이 정지한 ‘백 년 동안의 열다섯’을 감싸고 전과 후로 나뉘어 있다. 그렇다면 멈췄던 시간은 어떻게 다시 흐르게 되었을까?      


비밀은 ‘나’를 사랑한 이슬라에게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미쳐버리는 사태를 목격한 ‘나’는 마을을 가까스로 탈출한다. 그리고 사막에서 주술사 이탕카와 과거의 기억을 잃은 열다섯 살 소녀 아야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다.      


(...) 네 마음이 슬픔에 삼켜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실뿌리가 단단한 땅을 으스러뜨리는 것처럼 언제든 너를 파괴할 가시가 자라날 수 있으니까. 슬픔을 좋아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란다. (p.58)     


‘이슬라’는 주인공 ‘나’가 아야에게 새로 지어준 이름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나기 전 이슬라는 원래 ‘죽음을 낳는 자궁(p.124)’이었다. 모든 생명에게 골고루 죽음을 낳아주던 이슬라 앞에 어느 날 새끼를 잃은 어미 뱀이 나타난다. 뱀이 쏟아내는 증오의 말에 꾀어 이슬라는 죽음을 사산한다. 그날부터 이슬라는 스스로를 유폐했고 세상에서 죽음은 사라졌다.     


해로운 독을 삼키듯 여신은 뱀의 증오를 받아 마셨다. 전신으로 독이 퍼졌다. 이슬라는 처음으로 죽음을 사산했다. (p.125)    


이슬라는 ‘나’를 사랑하면서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다. ‘각설탕처럼 네 몸에 녹아들어가면 어떨까.(p.129)’ 하고 상상한다. 그리고 성장과 미래를 꿈꾸는 ‘나’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인간 세계에 죽음을 되돌려준다. 백 년 동안 지연되었던 죽음이 돌아오자 세상은 오히려 생동감이 돌고 한층 찬란해진다. ‘누렇게 말라버린 나뭇잎을 떼어내고 물을 주자 되살아난 화초처럼. (p.135)’      


그녀는 나를 사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나약함, 유한성, 그로 인한 슬픔과 이기심, 무엇보다 죽음을 소망하는 그 지점을 사랑했던 것 같다. 인간이 신을 숭배하듯 신 또한 인간에게 감탄할 수 있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p.117)         




인간의 유한성은 비극이 아니다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인간 삶의 유한함은 얼핏 허망함을 불러일으키는 비극일 것 같지만, 필멸의 숙명을 갖고 태어났기에 우리는 삶에 더욱 애착을 갖고 살아간다. 죽음이 있어야 인간에게 성장과 미래가 있고 그것이 곧 삶의 의미임을 소설 <이슬라>는 일깨워준다.    

 

무한의 인간은, 무한을 이길 수 없다. 오직 유한한 인간만이 무한에 대해 상상할 수 있다. 천장도 바닥도 없는 허공에 떠 있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다. (p.128)     


일상에서 우리는 죽음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가끔은 죽음, 즉 이슬라가 낳아준 자식이 찾아올 생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며 그날그날의 생의 감각을 만끽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이 삶을 무의미하게 소진하지 않게 하는 힘이다.     


삶은 그날그날 선물받은 깨끗한 수건과 같았다. 사람들은 제 몫의 삶을 살고 그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은 다음, 잠이 들었다. 생의 마지막 날에는 죽음의 여신 이슬라가 낳아준 자식을 받아들였다. (p.123)


<이슬라> _ 김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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