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보는 관계에 대하여
적잖이 화가 나는 일이 있었다.
모두가 이뤄 낸 성과에 대해 축하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포함되어야 할 많은 이들이 누락되었고 조직의 구조상 중추적인 역할을 표면적으로 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만 그런 자리를 갖게 될 것임을 관계자가 아닌 다른 이를 통해 알게 되었어.
사실 당시 이 글을 분노와 악에 가득 차 생각 없이 써내려 가다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어보자고 스스로를 진정시킨 후 한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이야기야.
내가 챙겼어야 했을 일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그런 나의 부족함을 특정인에게 돌리고 싶어 하는 그릇된 마음의 행보가 멋지게 나이 들어감을 지향하고자 하는 아빠의 모습에 너무나도 대치되는 것이라, 당시 늦은 시간 진행되던 미팅을 채 마무리하지도 않고 나와버렸어. 팀원들은 내 눈치만 봤을 텐데, 너무 미안하더라고. 그럼에도 당시에는 어떤 식으로든 나 스스로를 설득하고 납득시킬만한 요인을 찾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지켜내야 하는 조직의 규모가 너무나도 커져 있었고, 여전히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일의 중심엔 나의 자의식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어. 손해 보는 관계 혹은 구조란 여전히 내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장의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이, 내가 응당 누려야 하는 호의와 잔치에 참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타당한 양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치 회전문에 들어가려는 노인과 어린아이들에게 몇 초의 우선권을 선사하고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여유 정도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는 거지.
일단 결론을 얘기하자면, 목표달성에 대한 축하자리는 부서별로 각각 갖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어. 협업으로 다 같이 이뤄낸 성과인데, 축하는 부서별로 알아서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참 안타깝다. 더 많은 협업들을 해가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과정이 물론 전혀 도움 되는 결과는 아닐 거야. 앞으로 너희들이 경험하게 될 조직의 생활이 이보다 더 야박하거나 서로 극도의 조심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화라면, 각자 해야 하는 의무만을 다하고 그에 대한 타당한 보상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일반화될 수도 있겠다.
오랜 시간 '영업'이라는 것을 해온 아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 구조에서 난 적응하기 어렵겠다 싶어. 목표를 정하고, 성과를 낸 것에 대해 축하하고, 이런 자리로만 모임이 구성되면 누군가가 어렵고 힘들 때 동료라는 의식을 줄 수 있는 역할은 조직 내에서 누가 담당하게 될까. 의미 없는 모임을 지속적으로 갖는 것도 문제겠지만, 조직에서의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정서적 교감이 전무한 것도 안정감을 느끼며 오래 같이 가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지켜내야 하는 것들은 어떻게든 지킬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될 수 있는 많은 상황에서의 손해는 누구든 감당할 수밖에 없을 거야. 다만 의도적으로 계산된 손해에 대해 무조건적 수용을 요구받는 경우라면 얘기가 좀 달라질 것 같다. 아빠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지' 싶은 상황들도 많이 생기는데 굳이 이런 상황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아. 그럴 수도 있지 의 숨은 뜻은, 나였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수 있겠다 이거든. 그리고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모든 일들을 이런 너그러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 너희들에게 이런 태도를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의 감정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그런 대상과 굳이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는데, 이 행위 자체가 누군가를 눈치 보는 것과 비슷한 거라 이게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 나라는 존재를 지켜가며, 많은 경우 너그러움으로 안아주는 여유 또한 있었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서는 자기 수양의 시간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 감정이 상할 수 있는 관계의 시소 혹은 줄다리기 게임에서 초월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면, 굳이 이런 특수한 상황과 일상적인 사건들은 우리 삶에서 전혀 중요치 않은 일이 될 거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휩쓸리기보다, 스스로의 존재와 마음을 더 가꿔가는 너희들이 되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