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생각, 대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이 많아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나의 실행을 늦추고 더딘 걸음을 하도록 잡아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론 머리가 무겁지 않음에도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마주하기도 하죠. 문득 올려다본 천장은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저 우주와 같기도 하고, 손에 닿을 수 없는 세계가 되기도 합니다. 회사와 퇴사의 간극은 이렇듯 가깝고도 먼 친척의 관계와도 유사해요. 익숙하듯 낯설고 가까운 듯 불편하죠.
일어나지 못한 침대 위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올려다본 오늘밤의 천장은 제게 그러했습니다.
왜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쉴 새 없이 찾아드는 것일까요. 정말 궁금합니다. 떨궈낼 용기도 없으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고 그 안에서 완벽하게 주인공이 되어 있을 자신을 생각합니다. 몇 번의 도전이 나름의 성공을 이끌었고 마흔 중반에 다다르는 동안 저의 에너지는 조금씩 소진되어 갔겠죠. 스스로에 대한 미안함보다,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이 생에서의 하루가 내가 아닌 타인의 꿈을 향해 있고,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내어 놓거나 내려놓아야 이 삶의 굴레가 지금처럼 온전히 굴러갈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8년 전, 은행을 퇴사했을 때는 ‘살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고 도망치듯 10년의 세월을 정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다시 하려니 겁이 나는 걸까요?
함께하는 이들과의 시간은 나날이 높은 수준의 대화로 향해가고 있고 모두들 회사의 목표가 자신의 꿈인 것처럼 받아들여 넘치는 의지를 되새김질합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일까요? 그저 쉬는 것이 좋고, 무한대의 게으름으로 무장한 채 침대 위를 굴러다니는 소극적 무법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요? 모 바이오업계 회장님의 말처럼, 그저 쉬지 않고 하다 보니 대성공의 반열에 올라서는 꿈을 꾸기에 그에 부족하지 않은 체력적 조건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정말이지, 잘 모르겠습니다. 많은 것들에 감사하고 또한 그런 감정과 삶의 태도를 꽤 여러 번 글에 담아두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생각들과 환경의 변화, 주위의 동요로 저는 다시 한번 취약한 등껍질을 드러내게 됩니다. 언제쯤 이 세계의 반복을 끊어낼 수 있을까요.
높은 연봉을 받는다고 무조건 나의 상황이 ‘그저 행복’해 지지는 않습니다. 또한 지금의 평가와 보상을 지속할 것이라 보장하기도 어렵죠. 그만큼 해내야 하는 높은 수준의 일들이 많이 있을 테니까요. 계속해서 나에게는 다음, 다음, 그다음의 과제가 주어질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시간들을 온전히 나의 목표와 꿈을 겨냥하여 활시위를 당겨본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해집니다. 결국 지금까지의 선택은 일의 본질에 대해 변화를 준 것이 아닌, 일을 하는 ‘장소’의 변화였기에 큰 틀에서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출퇴근 시간을 포함하면 12~15시간가량을 업무에 사용하고 있는 셈이고, 개인의 시간은 조직의 상황과 우선순위에 따라 희생해야 하는 범주에 속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인 시간이, 나의 의지대로 나의 계획대로만 활용되기 어렵단 뜻이죠. 그렇기 때문에 급여라는 것을 받고 남들처럼 저도 저의 시간을 조직에 내어줍니다. 시대의 흐름이 바뀌며 가장 슬픈 노동과 보상의 구조로 비치기도 하고 있죠. 언젠가는 이 울타리를 떠날 수밖에 없는 때가 저에게도 다가올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나다운 준비들을 더 적극적으로 해나가야겠습니다. 고민보다는 행동들을 통해 말이죠.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금의 흐름을 이어가느냐, 당장 오늘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지금을 살아가느냐 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제게 큰 화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