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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story Oct 27. 2024

퇴직할 결심

 은행에 있을 때, 그리고 이직 후 회사에 적을 두었을 때, 양복 왼쪽 깃에 달아둔 기업 배지를 보며 한동안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매월 받는 급여와 더불어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조직에 대한 감사함과 충성심이 가득했던 때가 있었고, 이 자체가 나를 움직이게 했다. 가끔 불필요한 상상을 했던 것은, 시간이 지나 경조사가 있을 때 적지 않은 이들의 축하와 위로를 받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그리고 그때까지 '버텨보자'는 생각이 불합리한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피어올랐다. 거스르기 어려운, 그러나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보수성과 안정성의 기류가 언제나 내 주변에 가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퇴사를 생각할 수 없었다. 나의 육체와 정신은 '회사'라는 곳에서 메어둔 고삐에 단단히 묶여 있었으므로.




 회사라는 공간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든 벌어먹고살 수 있는 기술과 경험을 제공해 준 곳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손 치더라도 이 만큼의 지식과 실패, 성공의 사례들을 온몸으로 체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주저앉을 정도의 업무적 실수와 성과적인 후퇴가 있었어도 고용의 안정성은 확보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모욕감과 허무함을 감내해야만 했다. '돈 버는 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실감되기 시작했던 것은 대리로 진급할 무렵이었다. 업무의 영역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대리가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고, 당시 신입행원의 채용규모도 줄었고 지점으로 인력 또한 충원해 주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막내인 내가 잡다한 일들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또한 최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최소한 자료의 정리와 편철에 대한 절차를 처음으로 경험해 볼 수 있었으니 언젠가 이런 일들을 재연하거나 이 기억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연결고리의 역할 또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언젠가를 위해 지금의 경험을 '인내'해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사람에 열광하고 사람에 좌절했다. 

관계성에 취약함을 갖고 있었고, 이를 외면하기 위해 얕고 넓은 네트워킹을 지향했다. 지나고 보니 남는 것 없이 흘러간 시간들은 지난날의 이런 패턴을 견지한 결과였고 감사하게도 기억에 남고 떠오르는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되게 가까이 한 몇 안 되는 이들이었다. 퇴사의 순간마다, 이직의 경험마다 각기 다른 시기를 점유해 주는 이들이 있다. 나와 비슷한 커리어의 흐름을 갖고 있는 친구도 있고, 여전히 은행원으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친구들도 있다. 각자 저마다의 인생을 산다. 정답은 없고 선택만이 있다. 그리고 겹겹이 쌓여가는 그 경험들로 인해 앞으로는 더 나은 선택만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적이 있었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이직을 하면 정말 괜찮아지고, 지금보다 갑절은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나의 선택이 온전히 나의 제한 없는 선택지를 순수히 반영한 결과물이라 여겼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 '불가능한' 것 역시 나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으로 선택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판단이란 늘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없는 것인데 살아오며 형성된 편견은 가능성 유무를 판단하여 그나마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는 몇 가지 대안들을 머릿속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눈앞에 늘어놓았다. 


자, 열 가지가 있긴 한데 이래저래 네가 할 수 있는 건 세 가지뿐이네. 
이 중에서 골라보시지!



늘 이런 식이었다. 내가 외면한 것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던 나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나는,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는 옵션을 선택하는 것을 꺼려했다. 회피성 결정으로 점철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상황을 근거 없이 두려워했다. 대체 누구에게 비난받을 것이 두려웠단 말인가. 부모? 가족? 회사동료들? 친구들? 17년 전 가슴팍에 달았던 회사 배지를 자랑스러워하며, 사회적 인정이 중요했던 그 시절의 나는 여전히 기억도 아지 않는 이들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도 내 삶에 관심이 없는데도 말이다. 왜 이런 생각들을 이제야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시간이 없다. 어제 넷플릭스에서 <지옥 2>를 아내와 같이 보다가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었다. 극 중 1편에서 시연을 당해 지옥으로 간 박정자가 환생하여 본인을 구해 준 민혜진 변호사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곧 세상이 멸망할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1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루했던 와중에 이 대사가 나의 가슴을 쳤다. 어쩌면 진정 우리 스스로가 원하는 마음의 소리를 억누르고, 현실에 그냥저냥 적응하고 남들보다 그저 좋은 위치에서 일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며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지옥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상황에 투영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 결과겠으나 내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럭저럭 살만하여 진정한 내면의 울림을 모른 척하는 것이, 그렇게 살아가다 마주하는 나의 쉰, 예순의 모습에 떳떳할 수 있겠는가. 그때 숱하게 선택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희들 먹여 살리느라 어쩔 수 없었다며 가족을 탓할 것인가. 그리고 또 자녀들에게 내 부모처럼, '회사원의 삶이 가장 좋은 것이다' 라며 생각의 제한을 두는 가르침을 행할 것인가. 



무엇하나 온전한 내 뜻대로 행하지 못한 커리어였지만, 오늘은 가장 오래 걸린 결심을 해본다.

퇴사가 아닌, 퇴직할 결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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