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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은 마흔보다 더 빠르게 올 것만 같다

by Johnstory

원래대로였으면 마흔여섯.



2022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만 나이를 법적 기준으로 사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어 난 여전히 마흔넷이다. 그렇다고 회춘하는 것은 아닐 텐데 '아직'이라는 부사가 주는 상대적 안도감은 날 여전히 철들지 않게 해 준다. 그래, 난 '아직' 사십 대 중반에 이르지 않았다.




치열한 삶에서 그럭저럭 나만의 보폭으로 걷는 하루로 전환을 시도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재점검하고 돌아보지 안될 때라 생각되었던 작년 10월 말, 내게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놓아버림에 대한 결심은 생각보다 빠르고 단호했다. 그간의 일터에서의 정이라 함은, 지난 시간 충실했던 하루하루로 제 역할을 다했고 이제 그만하겠습니다,라는 짧은 인사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왔다. 수고했다는 위로도 필요 없었다. 나는 나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진심이었고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스스로의 평가와 외부의 그것이 일치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어떤 날은 희생이었고 어떤 날은 이기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평가는 아쉬웠던 기억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니 떠난 이에 대한, 떠나는 자신이 바라보는 상대에 대한 기억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집착하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난 과거가 되었고 내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었던 일은 남아있는 이들에게 행운 비슷한 것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만족스러운가



지금이 가장 치열하게 살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어야 하고 무엇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갈아' 넣어 명예와 부를 곳간에 차고 넘치게 쌓아야 하는 시기라고 술자리에서 동료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눅진해진 감자전에 달큼한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오가는 얘기는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함을 당연시 여기는 곳이 사회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것일까. 아니, 왜 난 단 한 번도 이런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쩌면 법의 개정으로 마흔 중반이 채 되지 않은 이 시기에 깨닫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무엇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나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었고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일 텐데 나는 나를 수단으로 여겼다.


내가 나로 살게 되면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고 비를 맞으며 언제든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만이었다. 걷다가 걷다가 마음에 맞는 이들이 있으면 계산 없이 말을 섞으면 그뿐인 것이다. 내일은 또 내일의 새로운 시간들이 펼쳐질 것이니 오늘에 갇혀있을 이유도 없고,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들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내가 수단이 되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터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했다. 잘하지 못했던 어제와 잘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내일의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공교롭게도 잘 풀리면 잘 풀릴수록 이런 하루는 늘어만 갔다. 노폐물들을 걷어내기 위한 수분을 섭취하기보다 찌꺼기들을 덮어버리려 술을 부어 넣었다. 선배들은 '다들 그렇게 산다'라고 했다. 다들 이란 말에 나 역시도 속해있다고 믿었다. 제도권 안에서 남부끄럽지 않은 직장에서 잘 벌고 있는 많은 이들 가운데 하나였을 테니 그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타인의 핑계를 대며 살았다. 부모 때문에 이렇게 됐고 대한민국 교육시스템 때문에 이렇게 됐고 가장이 됐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피해의식에 갇혀있었다. 어리석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은 잠시나마 편하긴 했었나. 왜 이런 생각과 정리와 비움과 놓아버리는 것을 직장에 적을 두고선 그렇게 힘들었던 것일까. 노력하지 않는 삶이 진실된 나의 삶이라는 것을 왜 그때는 알지 못했을까. 잠깐의 명상과 나를 알아차리는 정도의 수고로움이 나를 살릴 수 있는 길이었음을 왜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질문들이 남는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이 '어느덧 오십이 되어버린 나'를 위한 준비를 하기에 적기라고 판단되는 요즘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질문들이 나의 길을 알려준다. 나는 잘 가고 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그럭저럭의 보폭으로 걷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볍고 편하다. 이렇게 나는 오십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 고민과 생각 없이 일상을 받아들이던 그때 마흔을 맞이했던 그 시절과는 조금은 다르게 말이다.



나의 행복은 무언가를 갈구하고 이뤄내는 것이 아닌, 나로서 존재하는 나를 깨닫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나의 오십을 반겨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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