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까지만 해도 고민과 두려움이 없는 삶과 성공한 삶은 다른 것이라 생각했다.
오십을 향해가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이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보통 우리의 고민은 특정 대상 혹은 주제에 대한 나의 시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며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 나의 지배적인 감정을 선택하기도 한다. 심한 경우 우리는 그런 감정에 하루 이틀 그리고 꽤나 오랜 시간 압도당하며 끌려가는 시간들을 보낸다.
우선은 이런 나의 감정을 느끼는 '행위 주체로서의 나'를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행위하는 나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두고 관조적인 위치를 유지하면 일련의 흐름을 잡아낼 수 있다. 특정 대상에 대한 나의 감정은 좋은 것, 싫은 것처럼 양분화되고 이에 따라 내적 감정의 동요가 일어난다. 이것이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의 영역으로 흐를 때 우리는 그 사이클에 갇히게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우리가 '관찰자'모드로 역할을 확장해 나가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상황을 다시 바라본다.
특정 주제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함은 '아, 그렇구나' 정도로 인지하고 흘려보내면 된다. 그저 있음을 알아차리고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다. 그 존재에 내가 휘둘릴 이유도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내가 흘려보내면 그것이 내 인생에 관여할 일은 없다. 언젠가 또다시 등장하여 나의 이목을 끄는 상황이 생긴다 하더라도 난 똑같이 반응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부류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주제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대응을 하면 된다.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되는 주체를 객관적으로 분리해야 한다. 그것을 둘러싼 감정은 나의 반응이다. 주체를 분리하면 그 대상은 그거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감정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나의 선택으로 대상에 대한 감정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나의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으며 감정의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 그저 존재하는 대상들을 사심 없이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면 된다. '그저 있는 것이다'라는 인정과 함께.
나는 놀이공원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기억이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비위가 좋지 않았다. 차를 오래 타거나 조금만 어지러워도 금세 어지러워지고 토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내가 놀이공원에서 3D 영화를 보고 흔들리는 의자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앉아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때의 결말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나에게 놀이공원에서 이것저것 타는 행위는 '피하고' 싶은 것이다.
아내는 혼자서라도 놀이공원에서 여러 놀이기구 타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아내에게 이는 큰 즐거움을 주는 행위이고 마다할 이유가 없는, 없어서 못하는 것 중 하나이다. 2년 전 싱가포르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서도 아내의 기행(철저하게 나의 입장에서)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난, 이 정도는 괜찮다는 아내의 말에 속아서 허공을 날아다니는 정체 모를 놀이기구를 탔고 딸 옆에 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다. 특정 대상(놀이공원/놀이기구)은 늘 거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피하고 싶은 대상이냐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냐) 것은 오로지 자신의 선택이고, 나는 그 선택을 언제든 바꾸거나 무시하거나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인정을 하게 되면 그것이 그저 있음으로 나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존재에 빠져들어 예전의 감정을 되살려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존재가 내 옆에 있는 누군가라면, 그의 존재는 거기에 늘 있는 것이니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두려운 감정을 그저 흘려보내면 된다. 감정에 휘말리는 순간 우리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고 점점 빠져든다.
그래서 늘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로 우리를 놓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관찰자로서 나의 행동을 관찰하는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느 상황에서나, 어느 존재에게서나 자유로울 수 있고 그런 입장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내가 원하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지의 역량을 일상에서 꾸준히 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몸에 벨 수 있도록 명상하고 공부하고 생각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반복한다면 일상에서의 평온함은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