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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온한 단식

20시간 단식의 기록

by Johnstory

가끔 숨이 차고 1분 이상 달리는 것이 어렵다고 느낀다.



매일 그런 것은 아니고 전날 술을 많이 마시거나 야식을 먹고 다음 날 아침에 겪는 현상인데 결국 이게 주체할 수 없이 불어버린 체중 때문임을 잘 알고 있다. 10년 전 결혼식 때와 비교하면 정확히 20kg이 늘었다. 연봉은 더디올라도 체중은 매우 빠르게 늘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 나도 단식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는데 이제 더 미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이건 일주일이건 일단 한번 해보자 생각했다. 그럼 지금 난 뭘 해야 하나.


섭취하는 음식물의 양이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상황이니 무리한 운동을 삼가고 적당히 걷고 뛰는 수준으로 루틴을 이어가자 싶었다. 일요일이다. 뭔가 시작하기에 좋은 날이 아니던가. 의미를 부여하기엔 좋지만 여러 장애요인들이 있다. 아내와 아이들은 집에서 뭔가를 해 먹거나 할 텐데, 아 이게 고비다. 그래도 이겨내 보자.

한동안 스마트워치를 운동할 때를 제외하곤 빼두었는데, 단식하면서 생기는 몸의 변화를 추적해 보고자 24시간 착용하기로 결정했다. 심박수, 스트레스 지수, 수면시간 등을 확인해 보면 언제, 무엇 때문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확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수치를 알면 필요한 준비를 할 수 있을 테고. 뭘 준비할지는 모르겠지만 관련 정보를 갖고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생각한다.




07:14

아내가 반납해야 하는 도서관의 책을 전날 밤, 신발장 앞에 쌓아두었다. 그래, 나갈 구실은 충분히 생겼다. 책을 반납하고 돌아오는 동안 1시간은 걸을 수 있을 테고 기분에 따라 20분 정도 뛰어볼 수도 있으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나가는 김에 책도 반납하고 운동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사서 오면 아내도, 나도 뿌듯하지 않겠는가.

실온의 보리차 한 컵을 마시고 유산균도 한포 먹는다. 결혼 이후로 매일 아침 눈뜨면 물 한 컵과 유산균 한포를 먹는 습관이 생겼다. 아내 덕분이다. 결혼하고 바뀐 것이 뭐 이뿐이겠는가마는 무의식적으로 이어가는 좋은 습관은 분명하다. 고맙네 아내씨.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07:58

어제 못한 음쓰와 재활용 분리수거를 처리하고 걷기 시작한다. 우선 오늘 하루의 단식을 성공시키는 것이 목표다. 그리곤 또 하루. 일단 3일의 단식에 도전해 보기로 한다. 혈당과 혈압도 체크해 보면 좋겠는데, 가능한 범위에서 이건 이따 아파트 단지에 있는 헬스장에 있는 인바디로 확인해 보기로 한다. 혈당은 아무래도 확인이 어렵겠다. 단기간의 단식 이후 무엇을 먹어야 하나. 처음 떠오른 것은 죽, 자극적이지 않은 메뉴를 생각하면 우선은 죽이다. 그런데 요즘은 죽의 메뉴도 워낙 다양하고 '맛'에 중심을 둔 자극적인 죽도 있으니 잘 골라봐야겠다. 호박죽이나 팥죽, 그리고 전복죽 정도가 무난하겠지. 3일간의 단식 후 전복죽을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그리고 사과. 어렸을 때부터 몸살이 심하게 걸리면 엄마는 늘 강판에 사과 2개를 갈아주셨다. 입맛도 없고 음식을 먹기도 힘드니 사과라도 먹기 편하게 해 주신 건데 그 이후로도 결혼하고 몇 번 아내에게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내의 짜증을 기억한다. '안 해봐서 모르지? 이거 팔목 아픈 일이야'

그래, 몰라서 미안하다. 받아먹기만 했던 내가 뭘 알겠는가. 나의 편한 삶 뒤엔 누군가의 기도와 희생이 있었다. 그래도 이번 단식이 성공한다면 죽과 사과는 먹어야겠다. 최대한 단순한 식습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니 말이다. (걸어가며 검색해 본 한 가지는 단식에 대한 정보가 아닌, 영장실질심사에 대한 결과였다.)



09:06

역시 걷는 것은 단조롭다. 무리하지 않고 사부작사부작 25분 정도만 달려보기로 한다. 천천히 천천히. 롱패딩을 입고 뛰는 것은 역시나 효율이 높지 않다. 안 그래도 무거운 몸을 더 무겁게 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다시 집에 들어가서 정비하고 나오는 건 더더욱 비효율적이다. 일단 하자. 지금 내게 있는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말이다. 인터벌로 1분 달리고 1분을 휴식을 12회 반복한다. 워밍업과 쿨다운까지 하면 대략 3km 정도 될 테니 내가 기대한 운동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쯤 애들은 일어났으려나.



09:36

땀이 흥건한 채로 집 앞 단골 가게에서 아이스라테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했다.

생각보다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다. 이렇게 롱패딩까지 입을 날씨는 아니었는데.

집에서 샤워를 하고 나와 닥터베스트 퀘세르틴 브로멜라인 두 알을 먹었다. 3개월 전부터 먹고 있는데 나름 효과가 있다. 두 번째 구매였는데 이번 단식과 더불어 몸에 남아있는 염증들이 씻겨 내려가길 기대해 본다.

샤워를 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정말 최고다. 오늘 음식을 먹지 않을 테니 최대한 얼음이 녹아 좀 연해졌을 때 더 마셔보기로 한다. 그리고 오늘의 결심, 시도, 전개, 생각에 대한 기록들을 해나가 본다.



10:34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느끼는 감정들에 이어 생각나는 노래들이 있다. 토이, 015B.

그중 오늘의 시작은 015B 2집이다. 34년 전의 노래지만 여전히 명반이다. 당시 발매하고 시간이 얼마간 지나 길 건너 음반가게에서 아버지가 주신 용돈으로 이 앨범을 카세트테이프로 산 기억이 떠오른다. 설레는 마음으로 작은 가게에 가서 이 테이프를 집어 들고 계산하던 모습이 아주 선명하다. 당시 음악을 꽤나 진지한 자세로 대했던 나였기에, 다시 듣는 이 노래들로 옛 생각에 젖어들기엔 충분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앨범을 샀을 때, 아내는 4살이었...

'H에게'에서 역시 멈췄다. 아, 너무 좋다.

https://music.apple.com/kr/album/second-episode/1651987192



11:20

독서와 다이어리 쓰기를 하는 와중에 1차 위기가 찾아왔다.

아내와 아이들의 아점은 물만두국이다. 사골 국물에 계란을 풀고 물만두 한봉이 들어간다. 후추와 파를 살짝 곁들이고 코를 처박고 먹는 물만두국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거실에서 글을 쓰다 모든 장비들을 들고 방으로 복귀했다. 추가 메뉴도 했다. 감자스팸짜글이. 꼭 이런 날, 아내는 나의 이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기에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메뉴로 선택한다. 거실을 몇 번 왔다 갔다, 냄새도 맞고 비주얼도 살펴보고 코에도 갖다 대보고 온갖 미친 짓을 다해 본다.

' 단식이 뭐라고, 그냥 적당히 먹어 볼까' 눈뜨고 5시간 밖에 안 지났는데 집에는 유혹 투성이다. 난 과연 오늘을 잘 버틸 수 있을까? 배고픔에 우선하는 중요한 일들을 빠르게 진행해 보기로 했다. (이후 독서와 글쓰기를 이어갔다.)




14:25

약간의 두통이 있고 졸음이 온다. 이럴 땐 넷플릭스의 헤드스페이스를 활용한다. 7화 화 다스리기를 틀고 눈을 감는다. 단식과 명상이라. 가벼운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내 마음의 메타포를 실현시켜 줄 도구가 아니겠는가. 여전히 명상 중에도 두통이 있다.



16:15 단식종료

어제 20시에 저녁식사 이후 오늘 오후 4시까지 보리차와 아메리카노 한잔만 마셨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극히 짧은 시간일지 모르겠으나 꼬박꼬박 식사를 챙기는 나에겐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늘 자기 전까지 대여섯 시간만 버티면 되는데 아깝지 않냐고? 20시간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24시간을 채우지 못한 데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어머니께서 가져다주신 '횡성 한우 불고기'였다.


일단 내게 온 증상은 두통이었다. 워낙 먹는 양이 적은 내가 아닌데, 물과 커피를 제외한 모든 곡기를 끊으니 바로 증상이 나타났다. 아내 말로는 모 프로그램에서도 처음 단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선 20시간을 권한다고 하니 나쁘지 않은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선 집에서보다 밖에 있을 때 단식이 더 쉽겠다 싶었다. 집에는 위험요인이 많다. 맛있는 것도 많고 음식을 맛있게 잘해주는 아내가 있으니.

그래도 토요일 밤 8시부터 일요일 오후 4시까지 좋은 출발이었다. 우선 먹는 양을 조금씩 줄여가며 간헐적 단식을 지속해보려 한다.



무탈하고 평온했던 20시간의 단식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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