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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아들

by Johnstory

아빠는 다정했고 원칙이 있었으나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방학숙제로 곤충채집을 하고 표본 상자를 만들어가야 했던 어린 시절, 아빠는 장수하늘소를 잡기 위해 나무를 탔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실 무렵 방청소를 해둔 우리 두 남매에게 500원짜리 동전 하나씩을 쥐어주셨고, 주말이면 고무동력기를 만들어 널찍한 집 근처 공원에서 함께 날렸다.

아빠가 가져오시던 빛바랜 누런색의 재생지로 만들었을 것 같은 봉투에 수기로 내용이 적힌 두툼한 것을 엄마에게 건네줄 때면 엄마는 아빠를 안아주었다. 그것이 매달 아빠가 힘들게 일하고 받아오는 월급봉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IMF 이후 안정적인 직장을 나와 새로운 일을 하셨다. 20년 가까이를 다닌 한 직장에서 나올 무렵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당시 집안의 보탬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하였으나 기대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원하는 공부가 끝날 때까지 얼마든 지원해 줄 테니 너무 걱정 말란 그 말씀은 내게 더 큰 미안함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어렵사리 입학한 대학을 다니는 둥 마는 둥 나는 반수를 했고, 1999년 12월 24일 특차로 희망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아버지는 좋아하셨다. 재수를 말리던 집안 분위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아버지셨으나 나의 반수가 잘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흡족해하셨다.

훈련소 입소 전에 둘이 식사를 하고 싶다며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던(지금은 사라진) 기사식당엘 갔다. 순전히 나의 요청 때문이었는데, 아버지와의 식사에 의미를 두었다기보다 단지 이 집의 불백과 후식으로 마실 수 있던 식혜가 독보적인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식사만 하셨다.

복학을 해서 고시를 준비하겠다던 나를 말리셨다. 무난한 대학생활, 무난한 성적, 무난한 취업을 기대하셨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셨기에 그런 기대를 장남에게 하심이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 그 평범함을 벗어나려 애쓰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결론적으로 취업을 위해 졸업을 한 학기 연장하고 인터넷 수업만 들으며 나름의 준비를 했다. 다들 이런저런 금융 자격증을 따겠다고 도서관에서 열을 올리며 공부를 했다. 그럼에도 난 경제신문 2종과 영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래서였는지 나의 취업준비 기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1승만 거두면 되는 게 취업이라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리고 2008년, 1승을 거두었다. 그때 아버지의 눈물을 기억한다. 75:1의 경쟁률을 뚫고 은행에 최종합격 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보다 부모님은 더 좋아하셨다. 특히 아버지께서. 당시 은행에선 신입행원이 될 합격생들의 집에 꽃바구니와 작은 선물을 부모님 앞으로 보내주었는데 한동안 거실 식탁 위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랬던 곳을 내 발로 걸어 나가겠다고 했으니, 적잖이 실망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와는 다른 행보를 걸으려 하는 아들이 내키진 않으셨을 테니.



그런 아버지는 10년 전 할아버지가 되었고, 나는 그런 아버지의 한창때 시절만큼 안정적이지 못하다.



현실을 살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난 여전히 이상을 품고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고 실패하고를 여전히 반복한다. 그런 아버지와의 마찰은 은행을 나오던 2016년 이후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안정적인 직장에서 무난히 진급하며 단계적으로 이정표적인 삶을 살아왔을 아버지의 기준으론 난 이단아 수준이었을 것이다. 결국 난 은행을 나오던 그날 이후,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산다. 가끔, 아주 가끔 내가 지금까지 은행에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이미 너무 오래전 일이고 기억에서도 희미해지는 첫 직장의 분위기는 너무 많이 변했다. 실무를 주도하던 젊은 직원들의 세대교체와 업무 관행들의 전반적인 변화들로 매우 보수적이던 은행도 변화를 선택이 아닌 수용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환경이었다면 괴로웠던 시절의 마지막 모습보다 희망적인 생각들을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개인의 감정적 동요는 차치하고서라도 업무적 안정성은 지금보단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러한 생각 자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무의미한 상상일 것이기에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본다.

나는 그것이 실패이든 좌절이든 절망이든, 나의 선택으로 사는 인생이길 원했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나의 선택으로 아버지의 마음에 무거운 짐을 얹은 것은 아닌지 송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가끔 아버지와의 지난 시간들을 추억하며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려 하는 아들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몇 해 전 지하철역에서 걸어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럼에도 난 아버지를 부르지 못했고.


사진으로만 남겨둔 그때의 모습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돼지갈비를 굽고 도수가 높은 소주를 함께 나누면서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나의 아홉 살 시절 그때의 '아빠'를 떠올린다. 일흔 하나의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 마흔넷의 나 그리고 나의 아들.


이제 아홉 살이 된 나의 아들도 언젠가 나를 생각하며 복잡한 마음을 덜어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일찌감치 아이들에 대한 기대와 바람을 내려놓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들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다. 개별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가치를 지켜주는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마음 가득하다. 어쩌면 4년 전 마주한 나의 아버지의 뒷모습에, 그래도 짧고 작은 파동의 시간 속에서 무탈히 자라준 나와 나의 여동생의 그림자가 얹혀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식들의 삶이 오늘에 이르러 나름의 빛을 발하고 있음은 아빠,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된 한 노인의 헌신과 사랑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오늘은 당신의 어깨가, 뒷모습이 조금은 가벼워지길.

그 사랑의 무게를 조금씩 알아가는 아들이 있음에 안심하시길.

또한 우리의 역사를 이어갈 아이들이 있음에 흡족해하시길.


IMG_1631.jpeg 2021년 10월 12일 화요일 저녁 7시 23분, 나의 아빠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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