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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에 남겨둔 아내의 자연분만

길 위의 기록들

by Johnstory

길을 걷다, 특히 양재천을 두어 시간 걸으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장에 기록해 왔다.



때로는 음성녹음도 활용했지만, 보는 이가 없어도 민망할 때가 있어, 보통은 메모장에 써두었다. 그렇게 묵혀둔 기록들이 떠올라 살펴봤더니 2014년 10월이 첫 기록이었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337개의 메모가 저장되어 있었다. 기간을 생각해 보면 많은 양은 아니다.

곧 휴대전화를 바꿀 마음이 있기도 하고, 이렇게 묵혀둔-기록의 시점에서 본다면 유레카를 외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썼을 것들이지만-내용들이 어떻게든 세상밖으로 나오게끔 하는 것이 '쓰는 사람'이 의무라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공개적으로 써볼 수 있는 내용들은 이렇게라도 남기고 모두 리셋할 생각이다. 그간 폰으로 촬영해 온 여러 사진들 또한 이렇게 정리를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글자대로의 의미는 뭔지 알겠으나, 이걸 그때 왜 어떤 마음으로 기록했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 감정에 대한 것은 기록하지 않고 '애매한' 글들만이 남아있었다. 가장 최근의 메모들은 얼추 당시의 상황과 느낌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찝찝함은 남았지만. 늘 이런 땐, '뭔가 더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한동안 머문다. 그러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시간에, 또 그런 장소에서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보통 휴대전화 메모에 기록하게 되는 것들은, 급하게 흐르는 생각들을 놓치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런 것들을 입력해 둔다. 그런데 대게 그렇게 기록한 후로 분류작업에 공을 들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잊혔다. 시간이 지나 문득 떠올라 다시 열어봤을 땐, 이렇게 써먹지 못할 희미한 흔적이 되어버린 경우가 부지기수다. 글로 이어져 완성이 된 메모들은 사실 몇 없었다. 늘 새로운 생각들이 기존의 것들을 대체해 왔다. 어떤 면에서 추억의 한 귀퉁이를 더듬어주는 기억이 된 이 메모들을 정리하고 리셋하는 것이 내게 가능한 일일까?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은 일들도, 잠금 된 메모를 보면 그때의 생생한 감정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아내의 첫째 자연분만을 지켜보며 남긴 시간대별 기록을 보면서 말이다. 그때 당시에 내가 했던 생각도 떠오른다. 분명 아이가 나온 시간은 오전 7시 28분이었는데, 의사가 출생시간을 고한 시간은 그로부터 4분이 경과한 7시 32분이었다. 마치 판사가 법의 기준과 원칙대로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의사가 구두로 전하는 출생신고 역시 실제와 해석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말이다. 기록이 없었으면 영영 잊혔을, 그러다가 가끔 그때를 떠올릴 때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을 수준으로만 남아있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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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50623_152438373_01.png 첫째 딸아이의 자연분만 기록



이때 태어난 딸아이는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다.



남동생과 어지간히 싸우고 또 잘 놀다가 갑자기 엄마한테 짜증을 내는 사춘기의 전조증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10시간가량의 진통을 모성애로 잘 버텨준 아내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렇게 둘째까지 낳았으나 그 출산의 고통은 말로 들어도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복막염으로 개복수술을 하고 마취가 깬 후 미친듯한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아내는 그래도 두 아이를 자연분만한 고통보단 괜찮을 테니 잘 참아보라 했었다. 야속하고 서운했지만, 여전히 난 출산의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었던 그날의 역사이다. 당시 분만실에서 찍어둔 사진과 기록들을 보며, 시시각각 변하던 아내의 상태와 진통으로 힘들어하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문득 10년 동안 두 아이들을 잘 키워주고 나라는 사람을 잘 참아내며 함께해주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마저 든다. 메모의 끝에 전해지는 사랑과 감사라니,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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