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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군의 탐구생활 Sep 23. 2020

퇴사의 소회

바이오 벤처 회사에서의 1년 6개월

퇴사를 앞둔 나에게 사소하지만 진지한 고민 중 하나는 사직서에 퇴직 사유를 뭐라고 쓸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곧 누군가가 왜 회사를 그만두냐고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 있었다.


생각보다 답은 간단했다. 회사 측에서 보내온 사직서에는 이미 개인 사유라는 4글자의 사직 이유가 적혀 있었고 나는 그저 확인 서명만 하면 될 뿐이었다.


퇴직 의사를 동료들에게 밝혔을 때에도 퇴직 이유를 묻는 직원은 많지 않았다.


이유는 대부분 알고 있으리라..


1년 6개월가량 일했던 이 곳은 누군가에게는 천국이고 누군가에게는 지옥이었다. 


직장인으로 자기를 정의하는 사람에겐 야근 없는 근무시간과 벤처 회사 치고는 아기자기하고 다채로운 복지들이 괜찮았을 것이다. 연봉도 대기업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이 정도 규모 회사에서는 꽤 괜찮은 편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 회사에 오기 전까지 자신을 과학자로 정의하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자존감의 추락과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리게 하는 곳이었다.


대단한 신념도 아니었다. 

실험의 결과는 최소한  10번 중 5~6번은 반복돼야 뭔가 더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과 어떤 주장의 근거가 자기의 머릿속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객관적으로 나온 데이터야 된다는 것 등 아주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것들이었다.


나뿐 아니라 십수 년 이상씩 스스로 과학 하기를 즐겨했던 사람들에게 그동안 배워왔고 수행해왔던 모든 일들이 부정당한 채 그저 컨베이어 벨트 위 로봇팔처럼 움직이만 하는 시간들은 실로 자신의 영혼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내가 먼저 자리를 떠날 뿐 나와 같은 사람들에겐 떠날 이유가 충분했다.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가장 큰 바이오 벤처 사기극이 었던 테라노스의 스토리를 다룬 배드 블러드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여러 부분들이 지금까지 근무했던 이곳과 닮아 있어 씁쓸했다.


씁쓸한 마음은 평생을 과학에 몸 바쳤고, 테라노스에서도 맡겨진 직무와 회사를 위해 헌신했지만 오너의 잘못된 신념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점점 가장자리로 물러나 결국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이 많은 연구원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정점에 달했다.


그 내용을 읽으면서 들었던 몹시 불쾌하고 역겨운 느낌 때문에 책을 덮을 지경이었다.


슬프고 안쓰러웠다. 


새로 이직하는 회사라고 해서 파라다이스는 아닐 것이다. 회사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비 합리적인 부분들은 당연히 있을 것이고 그 회사 특유의 문제점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고 또 이곳을 빨리 떠난다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로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은 그곳의 사람들과 최소한의 과학적 상식과 양심을 가지고 일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혹 잘못돼 망하더라도 과정과 노력은 그대로 남아있어 다음 커리어에도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들이 또 다른 낯선 곳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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