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털찐 냥이 Jan 12. 2023

문 좀 같이 밀까요?

손목이 부실해서 죄송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이웃과 눈을 맞춘다거나 문을 잡아주는 정도의 작은 호의조차 귀할 정도로 도시에서의 고립이 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이 책에서 줄곧 살펴보았듯이 날로 심해지는 도시의 부산스러움과 날로 빡빡해져가는 시간표와 우리의 강도 높은 디지털 중독 때문에 이렇듯 순간적인 상호작용(우리는 이런 것이 우리를 확실히 덜 외롭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도 갈수록 드문 것이 되어가고 있다.


<노리나 허츠 지음_고립의 시대_홍정인 옮김_웅진지식하우스 2021>


외로움 경제 Loneliness Economy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코로나 시대에 가속화되어 버린 사회현상으로서,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서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지만 고립되어 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심리를 기업의 상품화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외로움이라는 단어에 경제가 붙으니 왠지 어색하다. 열대과일이 그려진 화려한 셔츠에 고쟁이 바지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사람이 패셔니스트처럼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것 같다. '나만 저 사람이 어색한가?' 싶게 말이다. 단어의 조합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 간의 상호 친절한 마음은 더 비싸지고 사막화되어 가는 시대일까? 생각이 든다.


"햄이 어떤 게 맛있어요?"


바게트 샌드위치를 만들어보려고 햄 코너에서 어슬렁거릴 때였다. 돼지고기  함유량, 국산여부, 가격등 꼼꼼히 보고 있는데 훅 하니 누군가 질문을 하며 옆으로 다가온다.

이제는 얼굴을 마스크로 꽁꽁 싸매고 있기에 눈빛과 말의 온도로 낯선 사람을 인지하게 된다.


나)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아휴 뭘 사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 "어디에 쓰시려고요?"


"아니 그냥 반찬 하려고요. 애들 키울 때는 이런 것들 사 먹었는데 베이컨은 너무 기름지고,

아저씨 반찬해줄려는데..."


나)"그럼 요건 어떠세요? 세일도 하고 양도 한 끼 해 먹기 괜찮더라고요."


아주머니는 고맙다며 카트에 내가 추천한 햄을 담았다. 나도 동일한 햄을 담았다. 그 햄은 손가락 두 마디 크기로 칼집내서 뽀득 소리 나게 구운다음 상큼한 케첩을 찍어 먹기 좋은 꼬맹이 햄이었다. 이런 햄은 양파를 숭 썰고 케첩, 전분, 물을 넣어 졸여도 한끼 뚝딱 먹기 좋다. 붉은색만 있으니 쪽파 다진 거나 파슬리 좀 뿌려 밥에 얹어도 아쉽지 않게 제 몫 한다. 그래도 접시 한쪽이 허전할 때에는 계란을 프라이팬에 깨자마자 우유를 조금 붓고 부드럽게 스크럼블하여 옆에 곁들이면 든든하다.


대화 중에도 햄만 쳐다보느라 아주머니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목소리로 스쳐가는 느낌에는 진짜 햄이 고민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마주치 든 생각으로는 '어쩌면 딸이 생각나서 말을 걸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였다. 물론 진지하게 햄을  고르는 나의 모습에 '너의 선택을 알려줘' 였을 수도 있다.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돌아서며 궁금해졌다.


아이들을 다 키워 독립시키고 남편과 단하게 먹을 저녁을 차리는 기분은 어까? 반찬거리 가짓수는 줄어들어도 여전히 밥은 반찬을 필요로 한다. 귀찮아도 장을 봐야 하는 일상은 이전보다 간단할까? 예전에는 설거지가 한번 밀리면 밥그릇이 모자랐을 텐데 이제는 밥그릇이 차곡히 쌓여서 개수대 안이 조금은 허전해 보이지 않을까?


여하튼 내가 왠지 말 걸고 싶은 사람이었다는 것 (사나운 인상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 홀로 쇼핑을 누군가와 잠시 같이 했다는 것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그나저나 햄은 어땠을까? 예전  일이지만 그 햄을 볼 때마다 베테랑 주부에게 미숙한 주부의 추천이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사소한 대화 그리고 사소한 친절은 매우 찰라이지만 틈틈이 여운을 남긴다.


요즘 빈번히 손목 터널증후군이 재발한다. 손목 통증이 잔잔히 오래갈 때에는 파스를 둘둘 말고 다닌다. 긴 팔에 가려져 파스가 보이지 않는 계절에는 곤욕스러운 일이 가끔 생긴다. 특히 백화점의 두꺼운 유리문을 열 때 내 손목은 바보가 된다. 동네의 메인 스트릿은 구조가 독특해서 어떤 길로 나가든지 백화점의 무거운 유리문을 두 번씩 열고 나가거나 들어와야 한다. 매번 곤욕스럽다. 앞사람이 밀어 재껴버린 문은 망치가 되어 손에 때려 잡힌다. 아! 내 손목이여. 찌릿 통증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른다.


한겨울 모퉁이 찬 바람과 함께  앞사람이 밀고 간 유리문이 결국 내 몸을 뒤로 확 밀버렸다. 앞사람이 박차고 간 유리문을 본능적으로 잡아챘지만 차마 손잡이를 잡는 것 이상을 해내지 못했다. '밀어!''밀라고!' 속으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안돼!' '아프다고!' '삐끗한다고!' 반항하는 손목의 주저함이 '어라?' 찰나의 순간에 내 몸이 확 뒤로 밀렸다.


내 뒤통수에 표정이 있다면 뒷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다. '제 손목이 부실합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응?' '몸이 다시 앞으로 간다?' 밀려오는 내 몸뚱이를 가엾게 여긴 뒷사람이 힘껏 손잡이를 밀어주었다. '어 간다?' '간다!' '앞으로 간다!'


민망하고 고마운데 차마 뒤통수를 돌려서 고맙다는 인사를 못하고 빨개진 귀를 앞으로 향하며 총총 갈길을 서둘렀다. 별일이 아닌 순간이었는데 난 무척이나 그 순간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 문을 지날 때면 그날의 고마움이 생각난다.


비록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내 손목은 할머니와 진배없기에 노약자 보호석에라도 살짝 걸치고 싶다. 동네에 스쿨존이 많다 보니 과속 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컹거리는 마을버스는 내 부실한 손목과 무릎을 극기훈련시키고 만다.


오늘도 팔뚝에 몸무게를 실어 유리문을 밀어내며 온몸으로 외친다. '문 좀 같이 밀까요?'


오늘은 길고양이에게  오랫만에 냥펀치를 당했다. 다행히 목도리에 날카로운 발톱 하나가 '톡'하니 껴서  다치지는 않았다. 몇달 전  다른 녀석에서 크게 상처입은적이 있기에 순간의 방심을 경계하지만, 쓰다듬어 줄 때의  그릉 거림에 내 마음도 녹다보니 잊어버렸다.

야옹군, 네 튼실한 앞발이 부럽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넘쳐나는 생각의 머리채 잡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