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이었습니다.
한솔이가 목이 말라서 눈을 떴습니다. 시계를 보니 밤 열한 시였습니다. 살금살금 방을 나와 부엌으로 갔습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데, 복도 끝에서 불빛이 보였습니다.
아빠 방이었습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니 아빠가 책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노트북 앞에서 뭔가를 쓰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이 밤에 뭘 하고 있지?'
한솔이가 궁금해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빠?"
아빠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한솔아? 왜 안 자?"
"물 마시러 갔다가…… 아빠 뭐 해요?"
아빠가 잠깐 망설였습니다. 그러더니 웃으며 손짓을 했습니다.
"들어와 봐."
한솔이가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노트북 화면에는 빼곡히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게 뭐예요?"
"동화."
"동화요?"
"응. 아빠가 쓰는 동화야."
한솔이가 눈을 크게 떴습니다.
"아빠가 동화를 써요?"
"응."
"왜요?"
아빠가 대답하려는데,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습니다. 시원이였습니다. 시원이가 눈을 비비며 들어왔습니다.
"한솔아, 뭐 해? 왜 안 와?"
"형, 이리 와봐. 아빠가 동화 쓰고 있어."
시원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노트북 화면을 보았습니다.
"진짜네…… 아빠, 작가예요?"
아빠가 웃었습니다.
"작가는 아니고. 그냥…… 쓰고 싶어서 써."
"누구 읽으라고요?"
아빠가 두 아이를 번갈아 보았습니다.
"너희."
"우리요?"
"응."
시원이가 물었습니다.
"왜요? 우리한테 그냥 말하면 되잖아요."
아빠가 잠깐 생각했습니다. 그러더니 천천히 말했습니다.
"아빠가 너희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무슨 말이요?"
"용기 내라, 약속 지켜라, 친구한테 먼저 다가가라, 싸워도 화해해라…… 그런 것들."
한솔이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냥 말하면 되잖아요."
아빠가 웃었습니다. 조금 쓴웃음 같았습니다.
"그게…… 막상 말하면 잔소리가 돼."
"잔소리요?"
"응. '숙제해라, 일찍 자라,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내라.' 맞는 말인데, 아빠가 말하면 너희 귀에 안 들어가잖아."
시원이가 생각했습니다. 맞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동화로 쓰기로 했어. 아빠 말 대신, 이야기로."
한솔이가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습니다.
"이거 다 아빠가 쓴 거예요?"
"응."
"몇 개나 썼어요?"
"이게…… 열 번째야."
시원이가 물었습니다.
"첫 번째는 뭐예요?"
아빠가 파일을 열었습니다. 제목이 보였습니다.
「검은 눈이 내리던 날」
한솔이가 소리쳤습니다.
"아, 이거! 아빠가 읽어 준 거!"
"기억나?"
"응! 시원이랑 한솔이가 나오는 거. 검은 눈이 오고, 따뜻한 말이 빛이 되는 거."
아빠가 웃었습니다.
"맞아. 그게 첫 번째였어."
시원이가 물었습니다.
"그 이야기……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응."
"뭔데요?"
아빠가 생각했습니다.
"무서워도 용기 내면 좋겠다는 거. 그리고 따뜻한 말이 힘이 된다는 거."
한솔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따뜻한 말……."
한솔이가 물었습니다.
"다른 건요? 다른 이야기는 뭐예요?"
아빠가 파일 목록을 보여주었습니다.
「약속 나무」
「할머니의 호떡」
「형이 아파요」
「잃어버린 장난감」
「새로 온 아이」
……
시원이가 말했습니다.
"이것도 다 우리 이야기예요?"
"응. 너희를 생각하면서 썼어."
한솔이가 물었습니다.
"'잃어버린 장난감'은요?"
"정직하게 말하는 게 어렵지만, 그래도 말해야 마음이 편해진다는 이야기."
시원이가 물었습니다.
"'새로 온 아이'는요?"
"먼저 다가가는 게 용기라는 이야기."
한솔이가 또 물었습니다.
"'싸운 날'은요?"
"싸워도 괜찮다는 거. 다시 손잡으면 되니까."
시원이와 한솔이가 서로를 보았습니다. 엊그제 싸웠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화해했던 밤도.
"……아빠, 다 알고 있었어요?"
"뭘?"
"우리가 싸운 거."
아빠가 웃었습니다.
"알지. 아빠니까."
한솔이가 말했습니다.
"아빠, 읽어줘요."
"응?"
"지금. 읽어줘요."
시원이도 말했습니다.
"나도 듣고 싶어요."
아빠가 두 아이를 보았습니다. 밤 열한 시가 넘었습니다.
"……내일 읽어줄까? 늦었는데."
"지금이요. 조금만요."
한솔이가 아빠 팔을 잡았습니다. 시원이도 옆에 섰습니다.
아빠가 웃었습니다.
"알았어. 조금만."
아빠가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갔습니다. 시원이와 한솔이가 아빠 양옆에 앉았습니다. 아빠가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첫 번째 이야기를 열었습니다.
"언덕 아래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아빠가 읽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조용히.
한솔이가 아빠 팔에 기댔습니다. 시원이도 옆에 바짝 붙었습니다.
아빠의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습니다. 검은 눈이 내리던 마을 이야기. 두려움을 이기고 산을 넘은 형제 이야기. 따뜻한 말이 빛이 되어 구름을 걷어낸 이야기.
한솔이가 눈을 감았습니다. 아빠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따뜻했습니다.
시원이도 눈이 감겼습니다. 이야기 속 시원이와 한솔이가 떠올랐습니다. 우리 이야기 같았습니다.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한솔이가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잠이 든 것 같았습니다.
시원이가 작게 말했습니다.
"아빠."
"응?"
"……고마워요."
"뭐가?"
"동화 써줘서. 우리 생각해 줘서."
아빠가 시원이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아빠가 더 고마워."
"뭐가요?"
"너희가 있어서. 쓸 이야기가 생겨서."
시원이가 웃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아빠가 두 아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잠든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아빠가 노트북을 덮었습니다. 불을 끄고 두 아이 옆에 누웠습니다.
창밖으로 달이 떠 있었습니다. 마당의 약속 나무가 달빛을 받고 있었습니다. 잎사귀가 바람에 살랑거렸습니다.
아빠가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너희가 이 이야기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아빠가 밤마다 읽어줬던 이야기. 그 목소리. 그 시간.'
'나중에 크면, 아빠가 왜 이 이야기를 썼는지 알게 될 거야.'
'그때까지, 아빠는 계속 쓸 거야.'
한솔이가 잠꼬대를 했습니다.
"아빠…… 내일도 읽어줘요……."
아빠가 웃었습니다.
"그래. 내일도."
시원이도 잠결에 중얼거렸습니다.
"……약속이에요."
"응. 약속."
아빠가 두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이야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아빠가 밤마다 쓰는 동화. 아이들이 자라서도 기억할 이야기.
달빛이 세 사람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약속나무가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