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 게임

by 보통 팀장
book12.jpg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시작된 비는 점심때가 지나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원이와 한솔이는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마당의 약속나무가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잎사귀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심심해." 한솔이가 말했습니다.

"나도." 시원이가 대답했습니다.

밖에 나가 놀 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은 이미 오전에 실컷 봤고, 그림 그리기도 질렸습니다. 한솔이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뭘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시원이가 말했습니다.

"한솔아, 우리 보드게임 할까?"

한솔이의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보드게임? 좋아!"

시원이가 방에서 게임 상자를 가져왔습니다. 아빠 생일 때 선물 받은 게임이었습니다. 주사위를 굴려서 말을 움직이고, 먼저 도착하면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내가 빨간 말 할래."

한솔이가 말했습니다.

"그래. 나는 파란 말."

둘이 거실 바닥에 앉아 게임판을 펼쳤습니다. 시원이가 주사위를 먼저 굴렸습니다.

"오, 육 나왔다."

시원이의 말이 여섯 칸을 갔습니다. 한솔이가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이."

두 칸밖에 못 갔습니다. 한솔이가 입술을 삐죽거렸습니다.

"괜찮아. 아직 시작이야."

시원이가 말했습니다.

게임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원이만 좋은 숫자가 나왔습니다. 육, 오, 육, 사. 시원이의 파란 말은 벌써 절반을 지났습니다. 한솔이의 빨간 말은 아직 출발선 근처에 있었습니다.

"형, 왜 형만 좋은 거 나와?"

"운이지, 뭐."

시원이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한솔이가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일이 나왔습니다. 한 칸. 한솔이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에이……."

시원이가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오가 나왔습니다. 시원이의 말이 점점 멀어졌습니다.

한솔이가 다시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삼. 이번엔 조금 나았지만, 이미 차이가 너무 벌어져 있었습니다.

몇 번 더 굴린 후, 시원이의 말이 도착점에 들어왔습니다.

"이겼다!"

시원이가 손을 들었습니다. 한솔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빨간 말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한 판 더 할까?" 시원이가 물었습니다.

한솔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응."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번째 게임도 비슷했습니다. 시원이는 또 좋은 숫자가 나왔고, 한솔이는 또 낮은 숫자가 나왔습니다. 한솔이가 열심히 주사위를 불고, 흔들고, 굴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에이, 또 이야!"

한솔이가 주사위를 바닥에 던졌습니다. 주사위가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한솔아, 그러면 안 돼."

"맨날 형만 좋은 거 나오잖아!"

한솔이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시원이가 주사위를 주워 왔습니다.

"운이 안 좋은 거야. 다음 판엔 나을 수도 있어."

"맨날 그렇게 말하면서 형이 이기잖아!"

한솔이의 눈이 빨개졌습니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시원이는 동생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솔이가 진짜로 속상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게임도 시원이가 이겼습니다.

한솔이는 말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고 소파로 가버렸습니다. 쿠션을 끌어안고 창밖만 바라보았습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원이는 게임판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겼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습니다.

'내가 이기면…… 한솔이는 계속 지잖아.'

시원이는 생각했습니다.

'그럼 재밌나?'

게임은 재미있으려고 하는 건데. 한솔이가 저렇게 속상해하면 무슨 소용일까요.

시원이가 일어나 소파로 갔습니다. 한솔이 옆에 앉았습니다.

"한솔아."

"……."

한솔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미안해."

한솔이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뭐가?"

"자꾸 이겨서."

"형이 잘하는 건데 뭘."

한솔이의 목소리가 작았습니다.

시원이가 말했습니다.

"근데 한솔이가 속상해하니까 나도 안 좋아."

한솔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창밖을 보았습니다.


비는 계속 내렸습니다. 시원이가 게임 상자를 들여다보다가 뭔가를 발견했습니다.

"한솔아."

"……뭐."

"여기 다른 게임 방법 있어."

한솔이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뭔데?"

"팀으로 하는 거래. 같이 하는 거야."

시원이가 설명서를 읽었습니다.

"괴물이 쫓아오는 거야. 둘이 힘을 합쳐서 괴물보다 먼저 도착해야 이기는 거래."

한솔이가 조금 다가왔습니다.

"괴물?"

"응. 검은 말이 괴물이야. 괴물은 매 턴마다 세 칸씩 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잡히면 지는 거야."

한솔이의 눈에 호기심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형이랑 나랑 같은 팀이야?"

"응. 둘 다 도착해야 이기는 거야. 한 명만 도착하면 안 돼."

한솔이가 소파에서 일어나 게임판 앞으로 왔습니다.

새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빨간 말과 파란 말이 출발선에 섰습니다. 검은 말이 한참 뒤에 섰습니다. 괴물이었습니다.

"내가 먼저 할게."

한솔이가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삼이 나왔습니다.

"괜찮아. 세 칸 갔어."

시원이가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사가 나왔습니다.

"나도 네 칸."

그리고 괴물이 세 칸 왔습니다. 벌써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형, 괴물 빨라!"

"괜찮아. 우리가 더 빨리 가면 돼."

게임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번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한솔이가 낮은 숫자가 나와도 시원이가 같이 걱정했습니다.

"에이, 이 나왔어."

"괜찮아. 내가 많이 가면 돼."

시원이가 굴렸습니다. 육이 나왔습니다.

"오, 좋아!"

한솔이가 손뼉을 쳤습니다. 시원이가 많이 가는 게 좋았습니다. 같은 팀이니까요.

괴물이 세 칸 다가왔습니다.

"형, 얘 진짜 무섭다!"

"빨리 가자!"

둘 다 웃고 있었습니다.


중반쯤 왔을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솔이 말이 뒤처졌습니다. 괴물이 거의 따라잡을 것 같았습니다.

"형, 나 잡히겠어!" 한솔이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시원이가 게임판을 보았습니다. 자기 말은 거의 도착점 근처였습니다. 먼저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한솔이는 혼자 괴물한테 잡힙니다.

"잠깐, 규칙 다시 볼게." 시원이가 설명서를 봤습니다.

"여기! 같은 칸에 있으면 주사위 숫자 합칠 수 있대."

"진짜?"

"응. 내가 뒤로 가서 한솔이랑 합치면 같이 갈 수 있어."

"근데 형이 뒤로 가면 괴물한테 더 가까워지잖아."

시원이가 웃었습니다.

"괜찮아. 같이 가는 게 더 좋아."

시원이가 말을 뒤로 움직였습니다. 한솔이 말 옆으로 갔습니다.

"자, 이제 같이 굴려."

둘이 동시에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사!"

"오!"

"합쳐서 구다!"

빨간 말과 파란 말이 나란히 아홉 칸을 갔습니다. 괴물과 거리가 벌어졌습니다.

"우와, 진짜 빨라!"

한솔이가 소리쳤습니다.

"이러면 이기겠다!"

시원이도 웃었습니다.


게임 막바지였습니다.

도착점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빨간 말과 파란 말이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뒤에서 괴물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한 턴만 더 버티면 됐습니다.

"한솔아, 이번에 삼 이상 나오면 이겨."

"알았어!"

한솔이가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주사위가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멈췄습니다.

오.

"이겼다!" 한솔이가 소리쳤습니다. 시원이도 같이 소리쳤습니다.

"이겼어!"

둘이 손뼉을 마주쳤습니다. 빨간 말과 파란 말이 나란히 도착점에 들어갔습니다. 괴물은 한 칸 뒤에서 멈췄습니다.

한솔이가 웃고 있었습니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습니다.

"형, 이거 재밌다!"

"그렇지?"

"아까보다 훨씬 재밌어." 시원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도 그래."

"왜 그런 거야? 아까도 게임인데."

시원이가 생각했습니다.

"……같이 이기니까 그런가?"

"같이 이기는 거?"

"응. 아까는 내가 이기면 한솔이가 지잖아. 근데 이번엔 둘 다 이긴 거야."

한솔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아. 형이 뒤로 와서 같이 간 거 진짜 좋았어."

"그게 더 재밌더라."

둘은 한참 동안 게임판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란히 빨간 말과 파란 말이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비가 조금씩 그치고 있었습니다. 창밖으로 구름 사이에서 노을빛이 비쳤습니다. 엄마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솔이가 말했습니다.

"형, 밥 먹고 또 하자."

"그래. 이번엔 괴물 두 개 놓을까?"

"두 개? 어려워지겠다."

"그래야 재밌지."

한솔이가 웃었습니다.

"좋아!"

저녁을 먹고 아빠가 거실로 나왔습니다. 게임판이 펼쳐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오, 뭐 하고 있었어?"

"보드게임이요." 한솔이가 대답했습니다.

"누가 이겼어?"

"우리요!"

"우리?"

아빠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시원이가 설명했습니다.

"같은 팀으로 했어요. 괴물한테 안 잡히면 이기는 거예요."

"오, 재밌겠다. 아빠도 끼워줘."

한솔이의 눈이 커졌습니다.

"아빠도요? 그럼 세 명이네!"

"세 명이면 더 재밌지 않을까?"

시원이가 말했습니다.

"괴물을 두 개 놓으면 딱 맞겠다."


셋이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빨간 말, 파란 말, 그리고 아빠의 초록 말. 검은 괴물 두 개가 뒤에서 쫓아왔습니다.

"아빠, 빨리 굴려요!"

"알았어, 알았어."

아빠가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이가 나왔습니다.

"에이, 아빠 왜 이래요!"

한솔이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빠도 운이 안 좋을 때가 있어."

시원이가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많이 가면 되죠."

셋이 웃었습니다.

괴물이 다가왔습니다. 아빠가 뒤처졌습니다.

"아빠 잡히겠어요!"

"걱정 마. 아빠가 어떻게든 해볼게."

아빠가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육이 나왔습니다.

"오!"

셋이 환호했습니다.

게임이 끝났습니다. 셋 다 도착점에 들어왔습니다. 괴물은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이겼다!" 한솔이가 소리쳤습니다.

아빠가 시원이와 한솔이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재밌었어?"

"네!"

"형이랑 둘이 할 때도 재밌었어요. 근데 셋이 하니까 더 재밌어요."

아빠가 웃었습니다.

"같이 하는 게 더 재밌지."


밤이 되었습니다.

비가 완전히 그쳤습니다. 시원이와 한솔이가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약속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비 냄새가 났습니다. 잎사귀에서 물방울이 반짝거렸습니다.

한솔이가 말했습니다.

"형."

"응?"

"오늘 재밌었어."

"나도."

"근데 형, 아까 왜 뒤로 온 거야?"

시원이가 동생을 보았습니다.

"뭐가?"

"형이 먼저 도착할 수 있었잖아. 근데 뒤로 와서 나랑 같이 갔잖아."

시원이가 생각했습니다.

"……그냥. 혼자 이기는 거보다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한솔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고마워."

"뭘."

"형이 같이 가자고 해서 재밌었어."

시원이가 웃었습니다.

"나도 그랬어."

둘은 한참 동안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구름이 걷히고 별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한솔이가 말했습니다.

"형, 다음에 비 오면 또 하자."

"그래."

"아빠도 같이."

"응."

바람이 불었습니다.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졌습니다. 반짝, 하고 빛났습니다.

한솔이가 말했습니다.

"형, 이기는 것보다 같이 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아."

시원이가 동생을 보았습니다.

"왜?"

"혼자 이기면 형만 기분 좋잖아. 근데 같이 이기면 둘 다 기분 좋아."

시원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아."

"그리고 혼자 지면 나만 속상한데, 같이 지면……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

시원이가 웃었습니다.

"같이 지면 같이 속상하니까?"

"응. 근데 혼자보다는 나아."

시원이는 동생 머리를 툭 쳤습니다.

"한솔아, 너 오늘 똑똑해졌다."

"진짜?"

"응."

한솔이가 웃었습니다.

별이 더 많이 떠올랐습니다. 약속나무가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형제는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내일도 비가 오면 좋겠다고 한솔이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또 같이 게임할 수 있으니까요.

이전 06화새로 온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