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독서로 풀어낸 자아성찰
취준생 때를 돌이켜보면 회피성 독서를 꽤나 오래도록 해왔다. 독서 자체의 의미로는 교양을 얻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행동이지만, 앞에 붙은 "회피"라는 단어가 약간의 꺼림칙함을 덧붙이고 있다. 독서는 하지만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어쩌면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맞닥뜨려야 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명분을 삼기 위해 하는 것. 그것을 지칭하는 나만의 언어로 "회피성 독서"가 있다.
취준생 때 회피한 것은 아이러니하게 취업이었다. 취업 과정 중에서 첫 번째 관문인 자기소개서 작성부터 포트폴리오, 면접 준비 등등을 해야 하는 것들을 피해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을 찾은 것이 독서였다. 그리고 여기에 곁들여한 것은 바로 책 리뷰를 SNS에 공유하는 것이었다. 책을 읽는데만 그치지 않고 그래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찔림이 있었기에(양심이 있었기에) 독서리뷰를 통해 SNS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고 여겼다. 많은 책을 사서 읽는 것은 경제적 부담감이 있기에 그리고 편식독서를 피하기 위해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서평단을 신청하며 다양한 장르의 서적을 무료로 받아 읽고 글을 쓰고 콘텐츠로 만들어가는 일을 했다. 백수였던 내게 나름 생산적인 업무 생겨 즐거웠던 것이다. 그렇게 회피성 독서를 하며 한 달에 20권 이상 읽기도 하고 평균적으로 10권을 읽는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다가도 잠시 머리 식힐 겸 새로운 세계로 빠져드는 시간을 틈틈이 가졌던 것이다. 책은 나에게 말 그대로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가 되기도 하고 나의 세계가 되기도 하는 매력적인 매체였다.
SF소설, 추리소설, 자기 계발, 감성 에세이 등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읽다 보니 나의 생활도 마치 확장된 기분이 들었다. 여러 자아와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나 자신 같은 오묘한 기분. 그렇게 취준생으로서의 회피성 독서는 독방에 갇힌, 앞길이 막막한, 눈앞이 뿌옇던 삶에서 여러 줄기의 빛이 되어서 넓은 세상을 마주치게 해 준 것이다.
다만 실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시련과 고통을 겪은 주인공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일 뿐 내가 직접 겪어보진 않았다. 열정과 노력으로 일궈낸 주인공을 보며 나도 마치 굉장한 걸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만큼의 퍼포먼스를 해내진 못했다. 독서의 아쉬움은 이것이다. 나의 세상을 넓히고 간접 경험을 통해 공감 능력과 상상력을 키울 순 있었지만, 나에게 직접 그 경험을 겪게 하진 않았다. 독서의 탓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이 그렇게 현실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회피성 독서라고 부르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기 위한 명분이기도 하며, 간접 경험을 마치 직접 경험으로 대체하는 그런 독서였던 것이다.
어쩌면 회피성 독서시간을 일부 빼내서 사회 경험에 더 투자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는 여러 경험들은 어땠을까, 혹은 스포츠 하나 배워서 지금까지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차피 돈은 쓸 수밖에 없는 백수인데 그럴 거면 아예 워홀을 일찍이 준비해 봤으면 어땠을까 등등 지금으로서 결핍처럼 남아있는 경험들을 시도했다면 나의 지금 삶과 태도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회피성 독서가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된 것 같다. 후회가 남아서.
시간이 흐른 후 직장생활도 이어가고 있던 차에 한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떠오른 회피성 독서. 친구 J는 10년간 수많은 질문과 궁금증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을 알아가며 성장한 친구다. 행동으로 나서기도 하고 질문을 반복하며 여러 의견들을 들어보고 사고를 바꾸어 갔다. 그렇게 자아성찰을 한 친구 J. 나는 어떻게 자아성찰을 하며 성장해 왔을까 돌이켜보니. 나는 독서를 통해 다양한 세상과 삶의 모습을 대입해서 풀어낸 자아성찰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으로 부딪힌 경험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럼에도 난 그 시간 동안 독서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봤고, 깊이 있는 생각에 빠져보기도 했으며, 궁금하던 것과 고민하던 부분에 대한 해결책을 얻기도 했다. 마냥 '회피성 독서'를 즐겼다는 약간 스스로에 대한 폄하가 있었는데, 친구와 대화를 하다 보니 그 10년 동안 둘이 시도한 행동들은 모두 지금의 나를 키워온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을. 회피일지라도 독서를 통해서 얻은 것이 지금의 나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회피성 독서면 아무렴 하는 마음가짐이다. 지금은 회피라고 생각할지라도 어쩌면 이 순간 가장 필요한 영양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잠시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일 수도 있으며,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렸으니 새로운 세계로 빠셔서 잠시 머리 좀 식히라는 신호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회피성 독서를 하며 나만의 세상을 넓혀가는 나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에게 칭찬도 하며, 한 편으로는 이전의 후회를 또 겪지 않도록 경험에도 충실히 해나가고 있다. 항상 밸런스는 중요하니까. 독서에만 편식해서 간접경험만을 넓히지 않고 더불어 직접 경험을 시도해 보며 나의 것을 키워가는 그런 건강함을 잃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