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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Jun 26. 2022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죽음을 맞는 '올바른' 방법

자신이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보고 싶다면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어보면(또는 나처럼 오디오북으로 들어보면) 될 것이다.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냉정하고 그러면서도 이반 일리치의 주관적 심리상태 곳곳을 어루만지며 간결한 문체로 그려낸 이 대문호의 걸작을 접하지 못하고 내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면 '아차' 하고 후회했을 것이다.


죽음의 고통은 오롯이 '생명'에게 그 책임이 있다. 몸의 한 구석에 치명적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몸의 다른 세포들은 일제히 생명을 위해 아우성치게 된다. 그러니 더욱 고통이 심해지는 것이다. 생명, 더욱 큰, 더욱 끈질긴 그 생명의 본질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고통으로 몰고 간다.


죽음의 순간을 묘사하는 톨스토이의 시각에는 약간의 모호함이 있다. 고통도 사라지고 죽음도 사라지는 그곳에 어떤 빛이 보였다는 묘사는 톨스토이의 종교적인 시각을 투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딱히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그것은 죽음 직전의 이반 일리치가 최고조의 고통에서 겪는 어떤 착각이나 환영인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 보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맞게 되면서 '올바로 살았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한다는 점이다. 톨스토이는 그 '올바름'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가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이반 일리치는 인구의 1%도 안 되는 귀족계급에 속하며 법관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며 살아왔다. 톨스토이가 이것을 모를 리는 없다. 단지 그 '평범한 삶'이란 규정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형태로 찾아오는 죽음의 평범성을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올바름'에 대한 독백은 하나의 생명의 가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그 생명은 끊임없는 생명을 욕구하면서 어느덧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 하릴없는 생명에 어떤 가치가 존재하는가? 톨스토이의 이 질문에 나는 답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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