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한강읽기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by 로로

우선, 60편의 시 외에 책표지 뒷면에 "전철 4호선..."으로 시작되는 제목도 없는 또 한 편의 시가 있다는 것. 아마도 작가의 발문인듯. "어둡다./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무엇을/나는 건너온 것일까?"


여느 시집과는 달리 시집의 제목에 해당하는 시가 없다. 단지 <저녁의 소묘 3>에 "(이런 저녁/내 심장은 서랍 속에 있고)"

라고 좀 더 강렬한 표현으로 슬쩍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시가 일인칭 "나"와 내가 느끼는 주변 상황에 대한 주관적 추상적 묘사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유달리 많은 시에 계절, 날씨, 시간(저녁, 새벽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시인은 "지금 여기에서" 부대끼고 있는 삶의 현장성을 부각시킨다.


이 시집엔 클라이맥스가 있다.


시집 전편에 걸쳐서 짙게 깔린 어둠과 고통을 뚫고 마지막 몇 편의 시에서는 가까스로 희망의 흔적을 찾아내 기어코 부여잡으려 한다.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로 시작되는 마지막에서 세 번째 시 <유월>은 역사성과 개인의 실존적 삶을 흔쾌히 연결해 주며 "살아라, 살아서/살아 있음을 말하라"라고 외친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시 <서울의 겨울 12>에서는 시집 전편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랑"이 모습을 드러낸다. 언뜻 보면 유일하게 정감 넘치는 시로 보이지만 "네가 온다면 사랑아,/올 수만 있다면"이라고 간절한 기다림을 표하지만, 그것을 '가정법'으로 여러 차례 반복함으로써 의심 혹은 회의로 흔들린다.


그리고 마지막 시 <저녁의 소묘 5>에서는 시집 전편에 걸쳐 등장하는 한강의 트레이드 마크 시어(詩語)들이 점령군처럼 난입한다. 죽음, 검음, 저녁, 피, 어둠, 혀, 빛, 칼, 투명 등이 총 출동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짧은 시는 가장 생동감 넘치는 반전(反轉)으로, 희망을 굳세게 부여잡는다. 과거형 시제를 사용해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선택을 확정짓는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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