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한강읽기

<희랍어 시간>을 읽고

- 언어가 미끄러지는 곳에서

by 로로



<희랍어 시간> 감상 토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뭉게구름으로 멋들어지게 장식한 하늘을 본다.


만약 '구름'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저 하늘을 보면서 지금과 동일한 느낌을 받을까?

언어는 우리의 지각과 인식과 느낌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

언어가 없을 때 어쩌면 더 풍부한 느낌을 대상으로부터 전달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린아이가 사물을 어떤 하나하나의 단어로 지정하는 것을 배워 나갈 때, 그래서 그 사물을 자신이 지배하는 인식의 손아귀에 넣을 때 사물은 그 자체로서 죽어가는 것이 아닐까?


한강이 무척이나 좋아해서 자신의 탄생을 그의 죽음과 연결시키려고까지 하는 마크 로스코의 그 거대한 네모 모양의 색채 덩어리에 하나씩 이름을 붙인다면, 로스코의 그림은 죽어가는 것이 아닐까?

한강은 그 그림에서 더 이상 거룩함을 느끼며 치열하게 자신의 감상을 묘사할 필요성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언어는 인간이 실재(實在)를 만나고 인식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대상을 지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어는 실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벽을 쌓는 일이 된다.


불행히도 인간의 언어는 그 실재에 온전히 닿지 못한다. 자꾸 미끄러져 버린다, 라고 한강은 어딘가에서 말했다. 언어는 실재 앞에서 너덜너덜해지고 까맣게 타들어간다. "악취 나는 말들" "너덜너덜한 언어" "공포스러운 단어" 한강은 이렇게 표현한다.


한강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말을 잃어버린 <희랍어 시간>의 주인공을 통해 문학적으로 정교하게 구성한다.


그렇다면 빛을 통해 더 이상 실재를 볼 수 없게 되어가는 남자 주인공에게 언어란 무엇일까? 그에게는 점차 언어가 실재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이 될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지만 언어를 통해 자신의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해 나가게 될 것이다. 어차피 언어가 실재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면, 그 언어만을 통해서 구성되는 또 다른 세계는 본질적으로 실재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언어만으로 구성되는 세계를 가진 남자와 실재에 닿지 못하는 언어를 버린 여자는 한강 작품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애틋하게 맺어진다. 하지만 한강이 어떤 멜로드라마를 쓴 것은 아니다. 불완전한 언어, 때로는 (실재에 대해) 폭력적인 언어를 통해 아슬아슬하게 실재와 접촉하는 그 아스라한 기적을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언어는 불을 이용하게 된 인간이 부드러운 고기를 먹으면서 발달하게 된 신체적 구조의 산물일 뿐이다. 이 언어의 기적을 한강은 늘 벅차게 그러안지만 돌연 언어를 버리고 싶은 내적 충동을 보여 준다.


<희랍어 시간>의 14장 '얼굴'은 특이하다. 이 장을 완전히 들어내도 독자는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작품의 다른 부분과 단절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장이 나중에 추가한 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강이 작품을 완성한 후에 무엇인가 말하고자 한 것이 충분히 담기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나중에 삽입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14장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와 사랑'으로도 알려짐)와 비슷한 설정을 가진다. 이성과 감성으로 대별되는 인간의 실재에 대한 태도를 묘사한 것이다. 이성은 언어를 통해 실재에 닿을 수 있다고 보는 태도이고 감성은 그 언어 넘어서 언어가 잡아내지 못하는 실재를 체감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굳건히 붙잡으려고 하는 독일인 친구 요하임 그룬델은 언어를 통해 실재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작품에서 남녀 주인공의 이름은 등장하지 많지만 유별나게도 잠깐만 등장하는 이 사람에게는 성과 이름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름이 없을 때, 즉 언어에 의해 지칭되지 않을 때 그의 존재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요하임 자신의 세계관을 말하려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남자 주인공에 대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 어떤 감정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한강은 내가 앞서 읽은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도, 그리고 <희랍어 시간>에서도 흔히 '사랑'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 감정이나 관계를 풀어내면서 '사랑'이란 단어를 철저히 피해 간다. '사랑'이라는 언어가 실체적 관계를 죽은 조각상처럼 꼼짝 못 하게 만들어버리고 독자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언어로 풍성한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쉽게 재단해 버리는 것을 두 눈 부릅뜨고 막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서도 한강 특유의 문장이 한 번 등장한다. 한강은 종교, 기도, 신 등을 말할 때 그 앞에 "내가 가져본 적이 없지만" "내가 믿어본 적이 없지만" 등과 같은 단서를 여지없이 덧붙인다. 처음엔 유별나다고 생각되었고, 그 후엔 집착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과 삶, 인간의 본질을 끈질기게 묻고 탐색하면서 작품을 통해 스스로 꺼꾸러지는 한강은 그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인간이다. 단지 '종교'나 '신'이라는 단어를 달리 사용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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