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imprint verb [ T ] ɪmˈprɪnt

by kei

장마가 끝나고 오랜만에, 그리고 처음으로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역시나 자전거를 좀 더 가볍고 좋은 것으로 바꿨다고 해서 속도가 더 잘 나오거나 엉덩이의 통증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어느 유튜버가 자전거의 속력을 올리는 몇 가지 방법이라는 영상을 올렸는데, 정답은 영상이 아닌 댓글에 있었다.


'너의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강북 쪽 자전거 길에서 가양대교를 넘어 강남 쪽 자전거 길을 타고 오다 동작대교를 넘어 잠수교로 가기 전에 낙타 등 같은 오르막 구간이 있다. 그 끝자락(아마도 흑석동 부근) 마지막 고개 우측에 작은 오두막과 운동기구가 놓인 공원이 있다. 나는 꼭 그 오두막에 앉아 마지막 숨을 고르며 담배 한 대를 피운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는 중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 누군가가 놓고 간 소주잔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건강을 지극히 생각하는 사람인지 영양제로 보이는 약병과 빈 캡슐이 소주잔 옆에 나란히 놓여 있다. 처음에는 극약인가 싶기도 했지만.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찍기 전부터 이미 '흔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주는 아니어도 나는 그런 경험을 자주 하는 편이긴 했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제목이 먼저 떠오르면 어떻게든 끝까지 써지는 편이다. 별로 완성한 글이 없으니 자주 한다고 말하긴 뭐하지만.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고 제목을 적을 땐 가급적 영어도 함께 써서 올린다. 워낙 영어를 못해서 늘 구글 번역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습관이 붙어서 귀찮더라도 찾아서 함께 적어놓는다. 오늘도 '흔적'이라는 영어 단어를 찾아 구글 번역기에 돌려 보았다.


trace 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고 '자취'라는 뜻이라고 나온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찾는 단어가 아닌 거 같다'고 내 안에서 말한다.

구글 번역 밑에는 비슷한 단어가 이렇게 추천(?)되어 있다.


evidence

증거, 증거물, 흔적, 명백

vestiges

흔적

imprint

날인, 흔적


세 번째 단어가 눈에 박힌다. 내가 찾던 의미다.


imprint

verb [ T ]

UK /ɪmˈprɪnt/

US /ɪmˈprɪnt/


to mark a surface by pressing something hard into it

표면에 무언가를 세게 눌러 표시

to fix an event or experience so firmly in the memory that it cannot be forgotten although you do not try to remember it: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잊을 수없는 사건이나 경험을 기억에 단단히 고정하는 것 :

That look of grief would be imprinted on her mind forever.

그 슬픔의 표정은 그녀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질 것입니다.


출처:https://dictionary.cambridge.org/ko/%EC%82%AC%EC%A0%84/%EC%98%81%EC%96%B4/imprint


대략 이런 의미라고 캠브릿지 영어사전에 나와있다. 물론 중간에 쓴 한국 번역은 역시나 구글 번역기로 돌린 것이다.

영양제 약병과 캡슐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소주잔이 왜 내게 이렇게 강한 '흔적'을 남긴 걸까?

아마도 그건 내가 알콜중독자이고 단주한 지 200일이 갓 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것뿐일까?

별로 찾는 이 없는 강변 옆 작은 오두막.

그 한쪽 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는 약병과 소주잔 하나.

그뿐이라면 그것뿐이다.

그러나 거기엔 사람이 있었고 지금은 없다.

어떤 사람일까?

어쩌면 술을 따라 마신 것이 아닐지도 몰라, 저 쬐그만 약병에 담긴 약을 맞춤한 잔이 없어 가져 온 소주잔에 따라 영양제 캡슐과 함께 마셨는지도... 아니, 어쩌면... 아니, 어쩌면... 아니...

모르겠다. 답이 없다.

반바지에 옅은 진한 녹색 티를 입은 잘생기고 건장한 청년이 내 앞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오두막 주변을 서성거리며 알아듣기 힘든 외마디 괴성을 지른다. 곧이어 아버지 또는 보호자로 보이는 반백의 사내가 배낭을 메고 오두막으로 와서 청년에게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건네주고 메고 온 배낭을 오두막 기둥에 기대어 놓고 뒷 산으로 이어진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매주 일요일마다 우연찮게 계속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다. 이제 나도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나 보다. 인증숏(?)을 찍고 자전거를 타고 오두막을 떠나 고개를 내려간다.

당분간은 비가 없기를 바래 본다.

그렇지만 하늘이 너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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