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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썰양 Aug 12. 2015

사회 초년생의 비싼 수업료

공순이를 꿈꾸는 그대에게, 두번째 이야기

"난 평생 옷으로 밥해먹고 살거에요."

정말 그럴 줄 알았다. 한의사를 꿈꾸었으나 낙방하고 차선책으로 의류학도의 길을 선택한 후부터 나는 평생토록 옷과 관련된 일을 할 거라고 자신했다. 어려서부터 바느질과 뜨개질을 좋아했고, 손재주 많은 엄마로부터 끼를 물려받아서인지 옷을 만드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패션 일러스트 학원도 다니고, 문화센터에서 유화도 그렸다. 각종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항상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떠오르는 디자인을 스케치했다. 수업이 없는 날엔 몇 시간씩 원단시장을 헤매고 다녔고, 도서관에서도 피카소나 마티스같은 거장들의 화집을 빌려보며 디자인에 응용할만한 포인트들을 찾곤했다. 많은 경험을 쌓아 언젠가 내 이름을 건 브랜드를 론칭하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던 청춘이었다.

 '모던'이라 쓰고 '난해하다'고 읽을 옷을 졸업작품전에 올리던 디자이너 지망생이었다.


치열한 4년을 보내고 2001년 2월 졸업을 했다. 스물셋 디자이너 지망생은 거대한 기업의 부속품처럼 일하느니 작은 회사에서 여러가지 일을 경험하며 옷의 모든 것을 배우겠다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대면 알만한 패션기업은 쳐다보지도 않고 여성복 회사의 막내 디자이너 모집 공고마다 이력서를 보냈다.

지금도 패션업계는 별반 나아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되는데, 그 당시에는 여성복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을 하려면 키 165센티미터에 55사이즈 피팅(샘플 옷을 입어보는 일)이 가능한 사람을 고용했다. 키와 신체 사이즈를 적은 이력서를 보내면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오는데 면접이란게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그 면접이 아니고 그 회사의 55사이즈 옷을 입어봐서 잘 맞으면 합격, 안맞으면 불합격이었다. 규모가 큰 회사는 피팅모델을 따로 두기도 하지만 한국 패션업계의 상당수가 브랜드 한두개로 꾸려가는 영세업체이다보니 피팅모델을 별도로 고용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대체로 막내 디자이너가 피팅모델을 겸하고 후임이 생기면 물려주는 상황이어서 키가 작거나 뚱뚱하면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애석하게도 내 체형이 피팅에는 적합치 않아 탈락을 거듭하던 중에 운좋게 ㄱ브랜드에 인턴으로 입사했다. 그러나 내 전임과 체형이 너무 달라서 피팅업무를 완전히 대체할 수가 없었고 결국은 1주일치 월급만 받고 쫓겨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백화점에 십여 개의 매장이 입점해있는 여성복 회사에 기획MD로 입사했다. MD란 머천다이저의 약자로 '상품 라인, 아이템 구성, 가격과 유통 등등 전반을 기획하는 업무를 담당'한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영세한 업체에서는 주먹구구식으로 상품을 카피하거나 지난 시즌에 잘 팔렸던 상품을 리뉴얼해서 만들기 때문에 MD의 역할이 모호하긴 하다. 이름없는 브랜드였지만 그 회사에는 여러 유명브랜드를 론칭한 실력자로 알려진 분이 기획이사로 계셨기 때문에 그분에게 업무를 배울 욕심으로 그 회사를 선택했었다.

인턴 3개월 동안 이사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열심히 업무를 배우던 중에 이사님이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분 하나 보고 입사한 회사인데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될 처지였다. 이직도 마땅치 않고 유학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유학갈 돈으로 자기 가게를 해보는 편이 훨씬 많이 배울테니 창업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사님이 제안하셨다. 당신이 생산업체도 알아봐주고 도와주마 하셔서 생각지도 못한 나만의 브랜드를 준비하게 되었다. 출장이라 쓰고 배낭여행이라 읽는 유럽여행을 다니면서 샘플을 구입하고, 원단 전시회와 백화점들을 구경하며 내 브랜드의 이미지와 상품들을 기획했다. 막연해서 두려웠지만 신나는 시간이었다.

한국에 돌아와보니 당장 가게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아빠가 추진하던 일이 성사되면 그 돈으로 매장을 열어주겠다고 했었는데 그게 잘 안되었던 모양이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나를 이사님이 부르셨다. 이사님은 영업을 하는 사장님이 되었고, 이름 모를 중년부인복 브랜드에서 기획 MD 3개월이 공식 경력의 전부인 나는 디자이너가 되었으며 우리 팀에서 기타 잡일을 맡아 하던 대리도 자연스럽게 창업회사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우리 사장님이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은 "파이를 키워서 나중에 나눠먹자"였다. 지금은 투자를 할 시기이니 월급을 주지 못해도 참고, 비품이나 필요한 부자재도 사주지 못하니 자기 돈으로 사서 쓰고 나중에 회사에 여유가 생기면 비용 처리해줄테니 영수증을 모아두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일종의 '열정페이'를 강요당한게 아닌가 싶은데, 그 당시에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생각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가 만든 옷이 날개 돋듯 잘 팔려서 회사가 성장하고 나는 창업 멤버로서 탐스럽게 잘 익은 과실을 따먹을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아니, 믿어야만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친구들은 좋은 회사에 들어가 월급도 제대로 받고 해외로 여름휴가도 가는데 나는 월급도 못받은채 언제 먹을지도 모를 파이만 키우고 있어야 했다.


결국은 먹지 못한, 그 파이 ㅠㅠ


그렇게 내 젊음과 열정을 밑빠진 독에 쏟아붓기를 일년 여, 회사는 상당한 양의 재고를 떠안고 있었고 우리 회사에 투자하겠다던 분은 더이상 돈을 주지 않았으며 당신이 살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창업을 했던 우리 사장님은 더이상 승산없는 게임이라고 판단했는지 나와 대리만 남겨놓고 모 백화점의 패션부문에 덜컥 입사를 했다. 명분이야 일거리를 우리쪽에 보내주겠다는 것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생각지도 않은 셋째까지 생겨 아이 기저귀값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절박함때문에 손절매하고 자기의 살 길을 모색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당시엔 우리를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침몰하는 배에서 혼자 탈출하는 건가 싶었는데, 가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이리라 짐작해본다.

2003년 2월 25일. 여자 생애에 가장 예쁜 나이라는 스물다섯 생일날 내 짐과 옷샘플을 주섬주섬 챙겨서 회사 셔터를 내리고 집으로 왔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며 열심히 살았던 대학 4년, 파이를 키우다가 끝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야만 지난 2년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근사하게 성공하는 건 드라마나 소설에만 있는 일이란 것도 알았다. 누구나 아는 진리를 깨닫기까지 너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야 말았다.

갑자기 길을 잃었다. 평생 옷으로 밥 벌어먹고 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길이 맞는 건지도 의심스러웠다.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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