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순이를 꿈꾸는 그대에게, 세번째 이야기
처음부터 공무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2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회사 셔터를 내려야 했던 무렵 아빠는 30여년 간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건설 시행사를 차렸다. 당장 취직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연스럽게 아빠 회사에 합류했다. 사장님 비서로서 커피도 타고 심부름도 하면서 남는 시간에 노느니 공부나 할까 싶어서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빠 회사가 부동산과 관련이 있기도 했고 당시에는 부동산 경기가 호황이어서 공인중개사가 대유행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불법이긴 하지만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대여하면 한 달에 백여 만 원씩 받을 수 있기도 했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으로 부모님께 사무실을 차려드리면 노후대비도 된다고 해서 너도 나도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공인중개사 시험은 1차와 2차를 같은 날에 본다. 1차는 부동산학 개론과 민법, 2차는 공인중개사 중개업법령, 부동산공시법, 부동산세법 그리고 부동산공법을 본다. (내가 이 시험을 준비하던 2003년엔 공인중개사 중개업법령은 시험과목에 없었다.)
시험 준비라고는 수능시험 이외에는 해본 적이 없어서 일단 서점에서 보기 편하게 생긴 수험서를 샀다. 과목별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1차 과목 1권, 2차 과목 1권으로 된 책이었다. 그 당시에는 주변에 공인중개사 시험에 대해 물어볼만한 사람도 없었고 월급을 제대로 받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학원을 다닐 수도 없었다.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상황이다보니 늘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야만 했다.
시험을 준비하기 전에 수험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카페에 가입해서 그들이 가장 많이 보는 수험서를 선택하고 그 책을 최소 3회독 이상 꼼꼼하게 보기를 추천한다. 좋은 수험서와 그렇지 않은 수험서는 분명 차이가 있지만 수험서의 차이가 당락을 좌우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은 수험서를 대충 한 번 읽는 것과 부족한 수험서를 꼼꼼하게 세 번 읽는 것 중에서 어느 방법이 더 효과적일까? 답은 다들 알고 있다. 다만 실천으로 옮기기가 어려울 따름이다.
시험 공부를 하다보면 이 책이 좋다더라 저 강사가 좋다더라 하는 얘기에 솔깃해져서 그 책을 사기만 하면 왠지 합격할 것 같고 점수가 드라마틱하게 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인류애가 넘쳐서 저자와 강사의 기부천사가 되고자 한다면 그리하시길 바란다. 책 한 권을 세 번 읽는 것보다 책을 세 권 사는 편이 훨씬 쉽고 마음의 위안도 되지만 사놓기만 한 책은 절대 내 실력이 될 수 없다. 같은 책을 3회독 하다보면 내가 어떤 과목에 취약한지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어서 그 과목만 온라인 강의를 수강하면 훨씬 효율적이다.
아빠가 야심차게 시작한 시행사는 동업자의 야반도주로 인해 풍비박산이 났고 또다시 회사 셔터를 내리고 집에 와야만 했다. 내 생일날 회사문을 닫고 나온 지 반년 남짓이었다. 졸지에 또 실업자가 된 나는 집에서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계속했다. 기본 수험서 3회독 후에 기출문제와 그동안 모의고사에 출제되었던 문제집을 풀어보았다. 공부깨나 하는 사람들은 틀린 문제로 오답노트를 만들라고 조언하는데 나는 오리고 풀칠하는 게 번잡스러워서 틀린 문제를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모아뒀다가 다음에 틀린 문제만 다시 풀었다.
전업 수험생으로 두어달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봤다. 민법이 기가 막히게 어려웠으나 운좋게도 과락을 면해서(한 과목이라도 40점을 넘지 못하면 평균 60점이 넘더라도 불합격이다) 아슬아슬하게 합격을 했다. 처음부터 공인중개사로 취업하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한 시험은 아니었으니 시험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패션디자이너 2년, 시행사 비서 6개월, 공인중개사 자격증.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단기간에 바짝 공부해서 합격하는 경험은 자격증 취득 그 이상의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다.
인생의 행로가 방향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