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도 생각 없이 입에 들어갈 때가 많은데, 오늘같이 얼그레이 아포가토를 먹을 때는 달랐다.
맛있다는 자극만 쫓으면 먹고도 허무할 때가 많다. 새롭게 맛본 얼그레이 아포가토에 생각을 얹으면 과거가 속속 들어와 뭔가 깨달음을 얻게 한다.
밀크티라고 해서 따뜻한 차라고 생각했는데, 아포가토를 생각 못 했다. 아이스크림에 얼그레이를 얹어서 주는 이탈리아의 디저트라고 한다. 나는 아이스크림 둘레에 있는 얼그레이부터 맛보았다. 이게 무슨 맛? 써서 비누 맛이 나는 것 같고 뒷맛은 독특한 홍차 맛이 났다. 아이스크림을 떠서 얼그레이를 적셔 먹으니, 쓴맛이 덮였다. 아니, 쓴맛은 1초간 튀다가 단맛에 섞여 사라지고, 얼그레이의 향기가 혀에서 맴돌았다. 쓴맛도 참을 만했다.
두 딸은 학교에 갔고, 아들이 피곤하다며 학교를 빠지고 방 안에서 쉬고 있는 오전 10시, 아침을 차려 놓고 밖을 나왔다. 집에 있으면 아들의 수발을 위해 대기하는 사람이 돼버린다. 이 기분에서 벗어나려고 세탁기에 세탁할 이불을 넣어 돌리고, 아침 먹은 설거지를 부랴부랴 해놓고 누가 쫓아올까 봐 튀는 사람처럼 집을 나왔다.
하늘은 푸른빛이 내려올 듯 찐했고 내가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다이소에 들러서 설거지할 때 쓸 면장갑을 찾는데 치수가 작아서 사지 않고 나왔다. 동네 벤치에서 시간을 좀 보낼까? 하다가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실지, 말지 고민하다가 이걸 고른 거다.
맨날 아메리카노나 모카, 라테만 마시다가 새로운 얼그레이 아포가토를 먹으니,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생각하게 됐다.
단맛만 쫓으면 쓴맛의 인생을 피하기 쉽고, 단맛이 쓴맛에 가리면 인생이 건조하고 무덤덤하게 흘러가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 얼그레이 아포가토처럼 단맛과 쓴맛을 조화롭게 섞어가며 살 수 있을까?
어떤 지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부업을 하시며 아이들에게 식사를 제때 해주지 않아 아이는 과자나 초콜릿으로 공복을 채웠고, 그 습관은 저혈당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인도 큰딸 이유식을 먹여야 하는 시기에 어린 아들을 챙기느라 신경을 못 써서 사탕이나 음료를 많이 먹였다고 했다. 그 습관으로 딸이 단것을 못 끊어서 20대 초반인데, 1형 당뇨를 앓고 있다고 했다.
내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마음이 아팠고 나도 어린 시절에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지인과 얘기 나눴던 기억이 났다.
단맛은 채우지 못하는 무언가를 달콤하게 감춰주는 것 같다. 단맛이 나쁜 건 아니다. 단맛으로 감춰야 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픈 거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단맛도 있고, 쓴맛도 있고, 여러 맛이 있지만. 두 가지로 이분해 본다면, 쓴맛을 피하고 싶어서 단맛만 추구하다가는 쓴맛으로 알아야 하는 인생의 가치를 모르거나 무덤덤하게 쓴맛을 대해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적당한 단맛의 가치도 잃고 단맛에 젖어서 나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인생에서 단맛인 것은 뭘까? 그리고 쓴맛인 것은?
오늘 얼그레이 아포가토를 떠먹으면서 더 깊이 인생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에서 단맛과 쓴맛을 살핀다.
아들의 수발을 피하려고 온 카페는 단맛. 쓴맛은 아들과 있는 공간.
얼그레이 아포가토를 먹으며 느낀 단맛은 “귀뚤이 동산” 동화를 수정하는 시간과 집에 가서 아들의 점심을 준비해 줘야겠다는 마음.
쓴맛은 잠깐 1초간 스친 얼그레이의 맛, 그뿐이다.
카페에서 한 잔의 얼그레이 아포가토가 오늘 아들을 피했던 쓴맛을 다 녹이고, 순간이게 했다. 이 디저트를 먹으며 보낸 1시간의 여유가 단맛의 적정선인 것 같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참치 두부조림과 잡채와 감자 계란국과 반찬을 차렸다. 아들이 한 시간 뒤에 나와 밥을 먹는다. 아들에게 잔소리할 마음도 없고, 미운 마음이 안 든다. 충분히 내 마음의 단맛이 쓴맛을 섞어서 얼그레이 아포가토를 만들었다. 지금도 그 맛의 향이 입안 가득히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