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한창 사이가 안 좋았을 때는 내 발걸음 소리에도 아들은 예민했다.
“왜 이렇게 발소리가 커요?”
“누나는 아무 소리 안 턴대! 보통 걷는 소리지, 네가 예민한 거야!”
“아니야, 엄마 발소리가 크다고! 좀, 사뿐히 걸을 수 없어?”
방에 있던 아들이 거실로 나와 내게 나무랄 때는 속 상하고, 아들이 나올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내가 그렇게 꼴 보기가 싫었나! 네가 화장실에서 괌을 지를 때는 아래층에서 올라올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한데!’
방 안에서 내 발소리에 신경 쓸 아들을 생각하니, 내가 아들한테 잘못한 게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예민함이 내겐 충격이 됐다. 나도 아들을 많이 못마땅해했고, 나무랐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내가 변해야 했다.
큰딸 입시를 치르면서 힘들었던 경험 탓인지, 아들이 진로를 변경하고 아들에게 집착하는 일이 많이 줄었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아이들이 부모의 바람에 부응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 나는 여유로워졌다. 자녀가 하는 일에 도움은 줄 수 있지만 그 일에 대한 책임은 자녀가 진다는 것도 알게 되니, 부모가 가슴을 졸이며 더 잘했으면 하는 바람에 하는 재촉과 눈치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큰딸도 고2 때 방황이 최고조였는데, 그걸 딸이 이겨낸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딸은 학창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을 못 간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고 했다. 자신의 현 모습을 받아들였다. 부모 탓을 많이 하던 딸이 스스로 인정한 것만으로도 나는 딸이 대견했다. 아픈 고등학교 시절을 잘 통과했고, 값진 경험을 했다고 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공부하는지, 공부하는 척하고 게임이나 다른 걸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학교나 학원에 안 갈까 봐 가슴 졸일 필요도 없고, 성적으로 자식을 걱정할 이유도 없어지고.
딸이 어느 봄날에 밝은 모습이 돼서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그때 왜 그렇게 성적으로 고민하고 걱정했지? 공부 안 하면 죽을 것 같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야!”
“알았으면 됐어. 그래도 엄마가 좀 더 잘하면 좋아서 얘기는 했었지.”
“그땐, 무슨 소리를 해도 들리지 않았을 거야!”
딸은 회상하는지 바라보는 눈이 그윽했다.
부모로서 딸에게 미안한 마음도 많고, 재수를 시켜줄 수 없어서 더욱 그랬다. 마음 한편에 짐이 있는데, 딸이 그 짐을 덜어준 것 같아서 감사했었다. 앞으로 딸이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참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서 자신의 삶을 행복하고 멋지게 만들어가길 기원한다. 딸의 모습을 봄의 새순처럼 바라보며 늘 격려와 희망을 심어주는 푸릇푸릇한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연년생인 아들의 수시 실기시험이 집중된 10월이다. 작년에는 딸 수시 실기시험 칠 때 같이 다니느라 바빴는데, 아들은 늘 혼자 다녀오겠다고 한다. 스스로 화장도 하고 머리는 친구나 선생님이 만져준다고 했다. 그래도 항상 아들이 뭔가 흘리고 다니는 버릇이 있어서 대기해야 한다. 이건 별일도 아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다.
“엄마 카드로 삼만 육천 원 주고 비비크림 샀어요! 평생 쓰겠습니다.”
“비비크림이 좀 비싸네, 알았어.”
아들은 다른 친구들은 샵에 가서 단장하는데 3~4만 원은 쓴다고 했다. 아들은 수시를 아홉 군데 지원했는데, 그때마다 자기가 화장을 해서 들어갈 돈이 굳었다며 좋아했다.
“엄마, 나 잘했죠?”
“그래, 고맙네.”
철부지 아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을 발견할 때는 몇 배는 더 얹어서 사랑스럽고 고맙단 생각이 든다. 내가 아들을 보듬고 격려해 주고, 긍정의 눈으로 보면 아들도 그렇게 내가 보이나 보다. 요즘은 아들이 엄마 발소리가 안 들린다고 한다.
어제는 내가 늦은 시간에 주방에 와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아들한테 미안해서 소파 있는 거실 쪽에 불을 켜놓고, 주방은 불을 끄며 설거지하고 있었다. 예전에 불이 방으로 들어와서 잠을 못 자겠다고 한 게 기억이 나서 그때부터 불을 끄고 설거지를 했고 익숙해졌었다. 그런데, 아들이 슬며시 와서 불을 켜주고 갔다. 아들이 나를 더 생각해 주고 있다고 느꼈다. 가슴이 뭉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