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3학년 언니. 오빠들의 시험 때문에 막내 학년의 학생들이 3일 동안 현장학습을 가게 됐다. 현장학습을 한꺼번에 몰아서 가는데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막내는 한 달 전쯤 간절기 옷을 꺼내달라고 해서 정리했는데, 입을 옷이 없다며 거의 내놓았다.
"작년에 잘 입었던 옷인데 안 입어? 이 투피스는 엄마한테 사정해서 산 옷이잖아, 오래 입겠다고 했으면서."
"작년 마음이랑 같아! 이제 안 입는 거라고. 이 옷은 작고."
일 년 사이에 키가 커져 못 입는 옷도 있고, 변심해서 못 입는 옷도 있고, 하늘색 카디건과 치마가 한 세트인 투피스는 어른 옷인데, 작년에 하도 졸라서 사준 거였다.
'죽어도 못 입겠다는데 어쩌랴.'
나는 투피스와 입을만한 옷은 몇 벌 빼놓고, 나머지 옷은 분리수거장에 있는 옷수거함에 넣고 왔었다.
"엄마 때는 언니 옷을 물려 입었고, 맘에 안 들어도 입었어. 그냥 입어!"
라고 얘기하면 엄마때와는 다르다고 하고, 6살 터울인 언니 옷을 꺼내주면 유행이 지났다고 안 입었다. 옷에서 출발한 얘기가 공부 얘기,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의 얘기까지 나오면 자연스럽게 막내의 귀는 막힌다. 아니 아이들의 귀는 절로 막히게 된다. 별다른 세상에 산 엄마의 얘기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 새로 사!"
옷을 사기로 하고 한 달이 지났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다 보니 새 옷을 사는 건 뒷전이었고, 학교나 학원에 갈 때는 교복을 입으면 됐다. 그런데 체험학습이라니.....
바지 두 벌이 있었는데 청바지를 입고 가고 싶었나 보다. 아뿔싸! 유일한 청바지는 세탁해서 빨래 건조대에 걸려 있었고, 막내는 5부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 나팔바지여서 찬바람 맞기 딱 좋은 바지였다.
첫째 날은 피곤해서 영어학원에 안 가겠다고 해서 나와 갈등이 있었는데 풀렸고, 둘째 날에는 잘 넘어가는 가 싶었는데 다녀와서 열이 난다고 했다. 37.6도의 열이라 감기약 먹으면 낫겠지 싶어 상비약을 먹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날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짧은 바지에 슬리퍼 입고 갈 때 마음에 걸렸는데...'
열도 내리지 않고 컨디션도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체험학습 가지 말고 바로 병원에 가라고 했지만 막내는 가고 싶은 눈치였다.
"동네 구립도서관에 간다고 했으니까 힘들지 않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면 다녀와! 힘들면 선생님께 얘기하고 바로 병원에 들렀다 집에 오고."
막내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지체 없이 나갔다.
"운동화 신고 가. 슬리퍼 신지 말고!"
"괜찮아, 이게 편해!"
요즘 막내는 부쩍 청개구리 같다. 뭔가 엄마한테 선택하라고 두 가지를 얘기하고선 늘 내가 선택해 주면 그것만 안 하면 된다고 한다. 머릿속에 엄마가 결정하면 반대로 해야 한다는 기억의 패턴이 있지 싶다. 나는 오빠 바지를 주며 입으라고 했는데, 오빠가 입지 말라고 했고 최근에 싸워서 더더욱 못 입겠다고 했다.
"오빠한테는 엄마가 잘 얘기할게. 긴 바지 입고 가."
나는 아들 옷 중에 막내가 입을 만한 바지를 찾아서 주었고, 그 옷을 입고 체험학습엘 갔다. 열이 38도가 넘었는데도, 학원은 빠져도, 어지러웠다고 하면서도 이겨내고 다녀온 것이다. 연달아 삼일은 힘들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체험학습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덕궁도 가고, 한옥마을과 도서관엘 다녀왔다고 하니, 매일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학교에서 콧바람을 쐬어주는 시간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병원에서는 감기인지, 요즘 유행하는 폐렴인지 오늘이 고비라고 했다. 열이 안 내리면 엑스레이를 찍으러 오라고 했다고. 딸은 영어학원에 빠지게 됐고, 나는 모처럼 병시중을 들었다. 어릴 때보다 수월하긴 하다. 이불을 꼭 싸매고 있으면,
"열 오른다. 이불 덮지 마!"
막내는 못 이긴 척 이불을 걷는다.
"그래도 열이 안 내려?"
"좀 기다려봐. 약 먹었으니까 30분은 기다려야지."
막내는 급했다. 30분이 안 됐는데도 우긴다.
"기다렸어, 어떡해?"
"긴 머리 묶고, 냉열패드 붙여!"
"알겠어, 알겠어."
"너 열 안 내리면 욕조에 미지근한 물 받아서 그 안에 있어야 돼!"
딸은 재빨리 패드를 이마에 붙이고 머리를 묶었다. 어릴 때 감기로 힘들었던 기억이 났나 보다. 그때는 물수건으로 열 내릴 때까지 온몸을 구석구석 닦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몸을 부르르 떨며 춥다고 뭐든 덮고 엄마는 뺐고...
딸의 호출이다.
"엄마, 손 시려, 발 시려! 장갑 줘! 수면양말!"
나는 장갑과 양말을 갖다 줬다.
"엄마, 물!"
나는 물을 갖다 줬다.
"아니, 우유라고!"
나는 정신없이 우유를 갖다 줬다.
"엄마, 엄마, 엄마...."
평소보다 바쁜 날이다.
딸은 누워서 핸드폰으로 옷을 고르고 있다.
손을 까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