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를 움켜쥔 소녀

반세기 전 추억, 하나

by 아이얼

며칠간 기습적인 폭우가 내리고 있다.
대나무 줄기를 얼기설기 엇대어서 세운 가녀린 뼈대에 파랗고 얇은 비니루를 덮어 대충 꼬맨 우산을 펴니

자그마한 소녀의 몸이 반투명 원 안으로 쏘옥 빨려 들어갔다.
바람에 찰랑거리던 소녀의 원피스 치마 자락이 이내 가늘고 새하얀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소녀의 치마 속 알록달록 꽃무늬 팬티가 드러났다.


세찬 빗줄기가 소녀의 가녀린 몸을 발끝에서 가슴까지 마구 쏘아대고 있었다.
소녀는 몸에 달라붙은 옷을 떼어내려다 그만 우산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소녀를 벗어난 그 우산은 휘리릭 날아가 공중분해되고 있다.
세찬 비바람에 찢기고 부서지는, 애초부터 예정되었던 부서짐,
그 처량한 조각들이 길거리에 슬프게 나뒹굴고 있다.


"엄마~ 아부지~~ "

소녀의 울부짖음이 비바람에 흡수되어 공중에서 흩어진다.
길거리 아무도 소녀의 울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저어기 길 건너 동네에 사는 정태가 황급히 빗속을 뚫고 오고있다.

"너 여기서 왜 이리 헤매고 있니?"

정태가 ‘왈칵' 소녀의 한 손을 잡는다.
소녀의 가슴이 갓 잡은 물고기처럼 콩닥콩닥 널을 뛴다.
이제 두 마리의 작은 물고기가 얕은 물길을 따라 나란히 헤엄쳐 올라간다.


엄마 아부지는 집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텔레비에서는 물난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의 곡성이 흘러나왔다.

아나운서 아저씨가 무어라고 계속 이야기하는데 소녀의 가슴도 따라서 울렁거린다.

이윽고 소녀가 담길 만큼 커다란 가방을 든 아부지가 마루로 나오신다.
문득 소녀의 곁에 꽂힌 듯 서있는 정태를 보고서 물으신다.

“정태 아이가? 니 집은 괜찮나?”

“저희 집 물에 잠겨가고 있어요. 저희 아부지가 남산에 있는 여관으로 피신하시래요. 방이 곧 다 찰 거래요.”

“그래! 그러잖아도 지금 그리로 가려던 참이다. 니도 같이 가자. 내 택시로 데려다줄게.”

아부지는 물에 흠뻑 젖은 소녀를 둘러업고 대문을 나섰다.
엄마는 양 손에 두둑한 가방 들고 메고 이고.. 그 뒤로 소녀의 언니, 오빠 그리고 정태가 줄줄이 따라붙어 사열 행진한다.


그날 밤 낯선 여관방에 여덟 명의 식구가 둘러앉았다.
아부지 엄마는 계속 대한 뉘우스를 보시고..

비좁은 방 한 귀퉁이에 누워있던 소녀는 이내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창문을 밝히는 환한 햇살에 잠이 깬 소녀는 밖으로 나왔다.
엄마 아부지를 따라 물 구경을 나섰다.

조각배를 타고 물에 잠긴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물 위로 많은 물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햇살에 하얗게 반짝반짝 빛나는 백자!
물난리 현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배영을 즐기는 듯 여유만만한 모습...
소녀는 작은 몸을 숙여 그 백자를 움켜쥐었다.
백자가 소녀의 품 안에 쏘옥 들어왔다.
백자를 안은 소녀는 자신의 원피스 리본 끈을 풀어 백자의 잘록한 허리를 돌려 매 예쁘게 묶어주었다.


소녀 옆으로 아저씨 아줌마들이 라면, 통조림, 술병 등을 앞 다투어 움켜쥐고 있었다...




정확히 언젠지는 모르겠다. (사진 찾느라 검색해보니 1966년인듯?)

문득 아주 어릴 적 겪었던 물난리가 생각났다.

우리 집 바로 건너편 골목까지 물이 찼었던 기억이 난다.

난 육 남매 중 막내였고...

정태는 나의 소꿉친구였다.

어린 소녀에겐 그날의 재난도 가슴 콩닥이는 서정적 풍경이었다.

빛바랜 추억은 비루함도 아름답다...


당시 용산구 우리집. 오빠와 함께
1966년 여름 홍수로 마을이 잠긴 풍경. 당시 내가 살았던 용산구 모습을 검색해 찾아보았다.
거리에서 팔았단 비닐우산
당시 비닐우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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