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소설
< 1984년 8월 20일 >
미국에서 시아주버님 가족이 오셨다.
"뭐야~ 이 집은~~ 미국 사는 형이 결혼식에 올 수 있다구해서 서둘러 6월 30일로 결혼날자 잡았었는데~ 그땐 안 오구 이제 나타나서 살림도 못하는 이 새신부를 곤혹스럽게 할 건 뭐냐구~ 당시 운 좋게 여름 장맛비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식 때 왔었어야지!"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동생 결혼식에 못 오느냐고~ 그리고는 뒤늦게 두 애들 데리고 들어와서 날 시집살이시키냐고~ 하여튼 이 집은 이상해. 수년 전 아버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때도 맏아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해서 우리 신랑이 상주 노릇 했다고 하더니만... "
어머님의 상식을 벗어난 관대함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12년 전 아주버님을 미국 유학 보내 박사까지 만드신 어머님이시다.
물론 존경스럽기는 하지만.. 가족의 도리상 과연 옳은 처사였을까?
아무리 급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이었고, 오고 가는 비행기 탑승요금이 부담이 되었다고 해도...
소위 한 집의 맏아들이 집안에서 벌어진 두 번의 경조사 현장을 걸러뛰다니!
이 모든 결례를 공조하고 묵인하신 어머님의 강인함과 굳은 의지력이 무섭기만 하다.
내게도 좀처럼 '이래라저래라', '좋다 싫다' 말씀 없으신 어머님..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거북하다.
< 1985년 5월 25일 >
"축하드립니다~"
의사의 의례적 인사가 오늘만은 특별하게 귓가를 타고 심장을 건드린다.
"아~ 나도 이제 엄마가 되는 거구나!"
병원을 나서며 잠시 망설였다.
"어디를 먼저 가야 할까?"
결정도 채 내리기도 전에 발걸음은 습관을 좇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자 어머님이 보라색 빛 고운 원피스를 차려입고 막 외출하시려는 참이다.
"어머님~ 저..."
나가시는 어머님 뒷전에 흘리는 어색한 언어가 당신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저.. 병원에 다녀왔는데요.."
어머님의 귀가 쫑긋해지더니 내 안색을 살피신다.
"임신했구나! 수고했다. 들어가 쉬어라~ 내 약속 있어 나간다."
별 감정 없는 어머님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김이 팍 새 나가고 있다.
"차암... 맥 빠지는 군..."
첫 소식 전하기 제1탄은 이렇게 밋밋하게 치러졌다.
어머님을 배웅하고 나서 신랑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왠지 심통이 났다. 그 엄마에 그 아들이라면 며칠간 소식을 지연시켜야 할 듯했다.
특별한 소식을 당분간 그냥 나 혼자 간직해야겠다 생각하니...
괜한 서러움에 목구멍이 조여 오고 콧가가 시큰해졌다.
이런 내게 반발하듯 최대한 화사하게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난 여전히 풋내 나는 예쁜 아가씨였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
명동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예쁜 구두며 옷가지들을 기웃거리다 보니 우울했던 맘이 조금 풀렸다.
얼마 전 수선을 의뢰했던 의상실에 들러 바지를 찾아가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저어.. 실례합니다... "
버스 안에서 부터 줄곧 곁에 서있던 키 큰 남자가 집을 향해 투벅투벅 걸어가는 내게 다가와 멋쩍게 하얀 카드를 내민다.
"저... 이번 주 토요일 제 책 출판 기념회를 하는데요.. 실례지만 꼬옥 와주실 수 없을까요? "
"혹시 지금 시간이 되시면 잠깐 차라도 나누고 싶은데..."
수줍게 말을 건네 온 그 남자의 눈빛이 깊고 선하다. 잠시 가슴이 콩닥거리다 이내 허망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신랑보다 키도 크고 인물도 훤한 문학청년이 느닷없이 다가와 손 내민 이 날!
난 한 남자의 여자일 뿐 아니라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 시작한 거다. 드라마틱하게도!!
그리고 그날 저녁 어머님은 양손 가득 갖가지 과일을 들고 환하게 현관문에 들어서셨다.
- 다음 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