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이 답은 아니다
지난 20일간 공간정리를 하면서 미니멀라이프가 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봤다. 미니멀까지 나가지 못하더라도, 정리정돈하고 유지하는 삶은 해보자는 작은 목표가 생겼고,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 정리 정돈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정작 생활의 불편을 느끼는 것들은 실제 공간제약보다- 가상의 공간의 제약이 생길 때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카톡 용량이 가득 찼다거나 외장하드가 곧 터질듯한 빨간 불이라거나 깔린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컴퓨터가 버벅대거나 정작 찾아야할 서류를 찾지 못해서 도전을 포기하거나 기한을 넘겨버리는 일들. 모두 일상에서 마주하는 가상공간의 혼란 때문에 생겨난다.
그래서 마우스 한 번 딸깍하면 생성되는 새 폴더에 이것저것 구겨 넣은 디지털파일들을 구분하고 버리고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장하드에 내 것으로 추정되는 파일은 모두 60기가바이트. 이걸 모두 언제 정리하지....방대한 사진과 서류, 음원과 영상, 작업파일 등등 하지만 정작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없는 파일을 보관한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 디지털파일의 수명은 생각보다 적다고 한다. (외장하드의 파일이 30년 후에도 고스란히 열릴 거라고 기대하지 마시란 이야기! 10년 넘은 외장하드는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진짜 아카이브를 하기위해서는 3개의 루트를 동시에 운영하는 게 좋다. (조선왕조실록을 카피본으로 따로 보관했던 조선기록사가들의 현명한 분배 법칙에 따라)
첫째, 아날로그형태로 출력해서 보관한다. 가장 정확한 방법이지만 가장 감당 안 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최고 중요한 문서가 아닌 이상 추천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과물을 보관하기엔 적합하지만 과정중의 디지털작업파일은 이게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게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디지털사진을 많이 보관하고 디바이스로 보는 게 편하지만, 출력해서 사진첩에 기록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디지털의 유실은 너무 쉽다.
둘째, 클라우드에 보관한다. 클라우드는 생겨날 당시에 개념이 생소했지만, 지금은 작업을 공유하거나 급하게 자료를 보내야할 때 유용하게 쓰인다. 그리고 구글드라이브, 네이버마이박스도 기본으로 제공하는 무료용량이 크기 때문에 데이터를 보관하기 좋다. 다만- 공익목적으로 무료 제공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기업마케팅 차원이므로 수틀리면 언제나 유료전환을 할 수 있고, 서비스가 인기 없으면 폐지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따로 보관도 필수다.
셋째, 외장하드에 보관한다.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하는 방식이다. 난 만약에 자연재해가 일어나 하나만 들고 갈 수 있다면 뭘 고를 거냐는 질문에 외.장.하.드라고 말했다. 컴퓨터야 어딜 가든 할 수 있지만 외장하드 속 콘텐츠는 나만의 것이므로! 소비만 한다면, 당장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볼 수 있는 전자디바이스만 있어도 된다. 하지만 소비 이상의 작업을 하고 있다면 외장하드에 콘텐츠를 기록하길 권한다.
나는 위 기록루트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가장 쉽게 하는 건 메일보내기다. 내게 보내기...메일함이 너무 금방 찬다. 요즘은 내게 카톡 보내기도 많이 하는데... 카톡 용량이 너무 빨리 찬다. 그래서 정리가 시급함을 느끼고 있다. 조만간 사이렌이 울릴 조짐이다. 정리하다보면 내가 얼마나 가상세계에 발을 많이 딛고 있는지, 어떻게 공생해야할지 답이 보이리라 믿으며- 형체없는 디지털파일을 정리한다.
요즘 디지털사진과 파일을 정리하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안 나간다. 쉽게 복사하고 버릴 수 있는 사진인데, <정말 버리시겠습니까? 복구되지 않습니다.> 라는 알림창을 보면 자꾸 망설여진다. 아이사진을 몇 테라씩 외장하드에 넣고 있다는 연예인들의 자식사랑을 들으면 콧방귀를 뀌었는데- 나도 뭐... 몇 살만 아니 몇 개월만 더 있어도 그럴 판이다. 아 왜 이렇게 쉽게 생산되는 것조차 비우기가 힘든 것이냐! 왜! 왜! 생각해보면 나 어린 시절 사진은 거진 안남았다. 왜냐면 내가 초등학생때 멋도 모르고 가위질로 모조리 오려놔서 ㅠㅠ 그리고 20대 시절도...싸이월드가 꿀꺽. (다행히 싸이월드는 10월에 부활한다고한다. ㅠㅠ) 그러다보니 더 집착하나?
생각해보면 회사 업무파일도 백업본을 몇 번이나 만들어놓고도 안심이 안 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쯤 되면 디지털저장강박증이 아닐까. 자꾸 잃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 뭔가를 찾아보기도 전에 없다는 생각이 먼저 나기도 하고.. 하하하 손실에 대한 두려움일까? 이러면 병이지. 백업파일 없어도 사는데 아무 문제 없는데 말이야. 중요한 건 기록이 아니라 현재 지금인데도 나는 기록과 연결, 보관 이런 걸 너무 중요하게 생각한다. 난 어쩌다 그런 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지속가능한 것에 대한 열망이 제법 큰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적정한 것을 찾고 유지하는 일에 큰 보람을 느끼는 것도 맞고. 지속성이 중요하다. 가능하다는 희망도. 지금의 지구를 보면- 위태롭긴 하지만.
디지털파일과 사진을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툴이 있다면 좋겠다. 내가 가진 모든 잡다한 걸 쏟아주면 그걸 순수하게 분류해서 라벨링 해주는. <소각의 여왕>이란 소설을 읽었는데, 거기 지창씨라는 주인공이 그런 기계를 만든다. 남들이 보면 정말 무한동력기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아 보이는 그 일에 종일 매달려 죽기직전에 과업을 완성한다. 분리와 배출이 전문인 사람에게는 그런 작업이 그렇게 환상적인 SF가 아니라 현실 과학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물론 이것도 작가의 허구 속에 빠져서 깨닫는 반쪽진실이지만)
어쩌다가 혜미는 소각의 여왕이 되었을까. 부흥의 시절을 지나- 과잉의 시대에 접어든 지금. 우리세대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매케한 연기를 들이마셔서라도 소각시켜서 기존세대가 만든 쓰레기를 없애는 것. 그렇지 않고서는 이 쓰레기들을 다 떠안고 살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 일을 누가 나서서 하지 않는다면 결국 남겨진 사람들이 하게 되는 거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사람이.
내가 이 디지털파일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남겨진 누군가 중 외장하드가 아쉬운 사람이 내 파일을 모조리 소각해버리겠지. 아니 될 말일세! 부지런히 정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