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관리자의 고민

사는 게 질릴 때는 냉장고를 털자

by 속눈썹

집안에서 가장 순환 속도가 빠른 구역이 있으니 이는 '냉장고'다. 냉장고는 당장 먹기 애매한 음식을 보관하기 너무 좋다. 너무 좋다보니 깜빡하기도 하고 그럼 꽁꽁 얼어서 화석이 되기 십상이지만, 어쨌든 냉장고 덕분에 당장 못 먹을 음식도 두고두고 먹으니 편리한 문명 물건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면서 내가 이 냉장고에 대한 관대함이 점차 줄어들고 예민해졌다. 냉장고는 방심하는 사이 엄청나게 불어나기 때문이다.


냉장고가 불어나는 건 내가 의도하지 않게 들어오는 음식들 때문인데, 시댁이나 친정에서 받은 음식은 그래도 부모님의 사랑이다 보니 딱히 거부하기도 어렵거니(서운해하실까봐) 실제로 유용하기도 하다.(내가 절대 못 끓이는 시래기국은 사랑이다) 그런데 남편이 기분이 나서 산 음식들은 솔직히 통제하고 싶다. 그래서 좋은 소리가 안 나온다.


"어묵 이거 사면 안 돼. 첨가물 있단 말이야. 그리고 오징어 소분해놨는데 왜 또 샀어? 물어보지도 않고."

"아니 나는... 네가 먹고 싶은 거 다 사라고 해서 샀지."

"고기 먹고 싶다고 해서 고기 먹고 싶은 거 사라는 말이었지. 아- 일단 알았어."


이렇게 타박으로 시작되어 이것저것 요리준비할 때 티키타카 밥 먹을 때 티키타가 육아하면서 티키타카 하다보면- 남편도 나도 함께 산다는 게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데 왜 인류는 이런 선택을 했을까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단지 종족번식을 위해서? 요즘은 번식을 안 하는 게 대세인데도?


나는 친구를 만나 남편에게 다 쏟아내지 못한 불만을 쏟아버린다. 남편은 자기가 요리하려고 하는 걸 내가 막는다고 하지만, 나로선 남편이 요리한다고 해도 내가 조수노릇을 하며 식재료와 양념을 다 찾아주어야 하니 그냥 내가 하는 게 편하다. 그리고 남편이 양 조절을 못해서 남기면 음식물쓰레기로 만들지 않는 이상 내가 물리도록 먹어야하니 잔소리가 들어간다. 남편이 어쩌다 음식을 한다고 사놓은 식재료를 나는 소진하기 위해 몇 날을 식단을 짜며 소진하는데 남편은 그 고생을 모르고 자기가 음식을 한대도 아내가 반기질 않으니 내가 고집이 세다고 한다. 그러면 난 그냥 고집 센 아내가 되고 냉장고를 방어적으로 관리하길 택한다. 서운해도 어쩔 수 없다. 아직 목표한 헐빈한 냉장고가 멀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내 고집에 맘이 상했는지- 아니면 뭔가 목표한 일에 진전이 없는지 남편의 표정이 어둡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그냥 사는 게 질린다고 한다. 내가 만든 음식이 맹숭맹숭해서 물린다는 말을 하면 복에 겨웠다고 핀잔을 주고 맘카페에 올려서 배부르도록 욕을 먹도록 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는데, 정작 남편이 삶이 질린다고 하니 뭐라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나는 사는 게 힘들어도 질린다는 생각은 좀체 안 해봤는데- 질린다는 표현 자체를 써 본적이 없는데-가까운 사람이 그런 말을 쓰니 그 심정이 어떤 건지 가늠이 잘 안 된다. 정말....내가 너무 야박해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을 괜히 삶에 에둘러 말하는 건 아니겠지.


냉장고 관리자 입장에서 또 고민한다. 사는 게 질리는 이 남자에게 힘이 나도록 하려면 냉장고의 무엇을 꺼내서 요리해야 하는지. 무엇이 시들어가고 있고 무엇의 기한이 임박한지. 나는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다가 일단 야채실 서랍을 들어내서 내용물을 탕탕 털어버리고 씻어냈다. 아빠가 텃밭에서 여러가지 무농약 야채들을 공수해주신 덕분에 야채가 부족할 일은 흔히 없다. 요즘 대파값이 장난 아니라는데, 그런 사정도 모르고 냉장고 안의 대파도 쑥쑥 자란다. 아 이참에 돈 아낄 겸 대파를 심어볼까...잠시 고민했다가 그냥 정리부터 마무리하기로.


집에 별도 트레이가 없는 탓에 우리집은 모든 수납을 종이가방으로 한다. 종이가방을 접어서 키를 낮추면 제법 그럴싸한 수납박스가 되는데 거기다 감자, 당근, 무 같은 뿌리 채소를 모은다. 그리고 양파는 양파망 그대로 보관하는 게 짱인 것 같다. 배추랑 시금치 같은 잎채소가 시들기 쉬워서 관리를 잘해줘야 한다. 이런 잎채소는 다른 채소와 함께 보관하면 금방 상한다. 채소가 너무 많을 땐 얼리는 것도 방법인데- 얼마 전에 치아바타를 대량 구매했더니 냉동실도 꽉 차버렸다. 그냥 야채실에 두기로. 사과 하나, 토마토 하나 딸기 한 팩이 남았다. 이번 주는 과일 사지 말고 이걸로 버텨야겠다.


결국 치아바타를 많이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어먹으려고 했는데, 샌드위치를 만드려니 양상추의 아삭한 식감이 너무 간절하다. 양상추를 사면 샐러드 해먹기가 좋은데, 소스를 매번 만드는 것은 품이 많이 들어 샐러드를 사게 된다. 샐러드도 한가지 맛으로만 먹으면 물리기 십상이니 머스타드, 참깨, 발사믹 이 세 종류와 케찹,마요네즈 기본 소스, 게다가 가끔 메이플시럽이나 연유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 종종 모으다보면 소스병이 .... 금세 불어난다. 그럼 다시 처음부터 돌아와서 그냥 야채실의 야채를 국이나 조림에 넣는 방향으로 전환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에 친구가 해준 샌드위치의 시금치가 너무 맛있었다. 시금치가 왜 이렇게 맛있냐고 물어보니 원래 시금치는 겨울 시금치가 맛있단다. ㅎㅎㅎ 아 놔....야채실은 헐빈하기 어렵겠다.


아무튼 냉장고는- 닫아놓으면 모르는데 여는 순간 참 많은 일거리와 창의성과 감정과 노동 그리고 제일 중요한 먹는 기쁨까지 안겨주는 신기한 마법 상자다. 얼마 전 명절에는 시어머님이 반찬을 너무 많이 주셔서 혹시 냉장고가 터질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실제로 냉장고가 신음을 했다...겁나서 얼른 먹었다는 일화) 다시 적당량을 보관하니 정기적으로 신음을 할 뿐 멀쩡하다.


냉장고야 내가 앞으로 열심히관리해줄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우리 같이 잘 살아보자.

잘 살아서 신선한 재료로 우리 남편 입맛도 찾아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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