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라는 이름의 폭력
사랑은 때로 가장 가까운 존재를 파괴하며 그 폐허 위에 신의 섭리를 조각한다.
잘못 만들어진 질그릇은 깨뜨려야 하고 놋그릇은 용광로에 녹여 쓸모 있는 새 그릇으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것을 신의 섭리라 부르고 올바른 부모의 권리라 확신하는 광기. 정용준의 소설 『너에게 묻는다』는 이 지독한 오만함이 한 인간의 생애를 어떻게 난도질하는지 응시한다. 정용준 작가는 평소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들, 이름조차 부를 수 없거나 잃어버린 자들의 곁을 서성인다. 그는 말하지 못하는 자들의 침묵을 문장으로 옮기고 이름 없는 자들의 서러움을 산책하듯 더듬어 나간다. 이번 작품에서는 ‘사랑’이라는 성스러운 외피를 두른 채 자행되는 사적이고도 내밀한 폭력, 아동학대, 그리고 그것을 방관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폭력을 가감 없이 직시한다.
부모라는 거대한 함정과 창조주의 오만
자식을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부모라는 명제는 우리 사회에서 틀려서는 안 되는 진실로 통용된다. 경찰도, 이웃도, 법도 이 명제를 믿는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 말이 무너지는 순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기초적인 윤리가 붕괴하기에. 그러나 소설은 바로 그 '틀릴 수 없는 진실'이 누군가에게는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의 문턱이 된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학대를 훈계로 포장하고 폭력을 신의 뜻으로 합리화하는 이들에게 자식은 고유한 영혼이 아닌 '나의 것'에 불과하다. 안인수라는 목사가 설파한, 이 피조물은 창조자의 것이라는 논리는 부모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식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괴물 같은 권력을 부여한다.
안인수의 아내는 남편의 폭력을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어져서 믿는다"고 말한다. 그녀의 표정은 결여되어 있고 정신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다. 엄마의 껍질을 뒤집어쓴 유기체처럼 변해버린 존재.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나의 약점과 절박함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존재가 나를 파괴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디로 숨을 수 있는가. 타인은 기껏해야 피부를 상하게 하지만 가장 가까운 이는 내밀한 장기를 녹이고 영혼의 결을 찢는다. 잘 알고 이해하는 만큼 그들은 우리가 무엇에 가장 약한지 정확히 알고 그곳을 찌른다.
법이라는 무능한 조립체
정의라는 이름의 권위는 실상 누군가가 이 판례 저 판례를 뒤지며 내리는 기계적인 판단의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다. 법은 법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경찰의 발과 변호사의 입, 검사의 손과 판사의 머리로 조립된 이 거대한 인간형 기계는 정작 개별적인 인간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요란스럽게 불을 지르면 둔한 벌레 몇 마리는 잡을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악은 더 좁고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누굴 갉아먹는지 모르게 된다. 탄원서 몇 장에 집행유예로 풀려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가해자들. 그들이 다시 문을 걸어 잠글 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시는 '공적 영역'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다.
법이라는 이름의 인간은 인간을 모른다. 열여덟이 되어 보육원을 떠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줄 알았지만 문 밖에는 길이 없었다는 아이들의 절규는 우리가 외면해 온 사회적 공백의 다른 이름이다. 보호받지 못한 생명들은 법의 테두리 밖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서서히 소멸해 간다. 작가는 묻는다. 이 모든 결과를 초래한 것이 법이라면, 법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누군가 대신 그 짐을 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누구의 책임이라 불러야 하는가.
침묵이라는 유일한 저항
상처받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입을 닫는 것이다. 울게 할 수도 있고 때려서 비명을 지르게 할 수도 있지만 의지로 굳게 걸어 잠근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지키려는 그 처절한 몸부림은 되려 그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작중 주인공인 유희진이 목격한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냉담함과 무표정이 서려 있다. 눈치를 보다 고개를 숙이고 나중에는 안 보이는 척 멍하게 있는 그 상태. 그것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단절이다.
마음속에 없는 것은 깊숙이 감춰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 있다고 믿고 싶어서, 혹은 있어야만 하니까 있다고 우길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재가 되지는 않는다. 부모에게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아이가 그 부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시리고 차갑다. 엄마의 재를 물에 타 마시며 결코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늘 함께 있겠다고 다짐하는 유희진의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슬프다. 그것은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사랑을 내면화하기 위해 선택한 가장 극단적이고도 유일한 방식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따를 수 없는 윤리와 새로운 길
우리는 흔히 보편적인 윤리와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따를 수 없는 윤리를 윤리라는 이유만으로 따라야 하는가. 정의롭지 않은 정의를 정의이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가. 소설 속 유희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차라리 자신만의 윤리를 세우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선택은 법과 시스템이 포기한 폐허 위에 개인이 직접 발을 들이는 위험하고도 숭고한 성찰로 이어진다.
누군가의 오늘을 파괴하고 내일을 앗아간 것이 생명이라면 어떤 이자로도 갚을 수 없다. 판결 한 줄에 눈물 흘리고 박수 칠 수 없는 이유는, 그 판결이 아이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단 1초도 되돌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덧없는 말은 그저 덧없는 말일뿐, 다른 무엇이 되지 않는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 수취인 불명 딱지를 받고 되돌아올 편지를 계속 쓰는 것. 이제는 이런 일을 숭고하다고 미화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그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일 뿐이다.
가족이라는 성역은 때로 폭력의 완벽한 은신처가 된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라는 안일한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심장을 찌른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 상대가 내 뜻대로 빚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깨뜨려버릴 수 있는 그릇도 아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릇된 신성을 이제 그만 무너뜨려야 한다.
모든 것을 참지만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아이들, 그리고 기뻐도 우는 어른들에게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당신의 오늘은 안녕한가"라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을 만한 정의가 부재한 세상에서 서로의 곁을 지키며 텅 빈 객석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비록 그 노래가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 소리가 모여 누군가의 무너진 삶에 작은 교두보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용준의 문장을 통해 본 이 아픈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답을 준비해야 할까.
사랑이 무엇을 부수는 망치가 아니라
무엇을 지키는 품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길고 긴 중얼거림을 맺는다.
불가해한 용광로 속으로
기꺼이 손을 집어넣는 그 용기가 우리에게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