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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을 건다: 속초 동아서점 이야기 - 김영건

내가 기억하는, 나를 기억하는

by 세잇

몸이 지치고 마음이 헛헛할 때마다 생각나 짐을 챙겨 떠나는 장소가 다들 한 군데 정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제겐 속초와 양양이 그렇습니다. 20여 년 전 소대장으로 시작했던 군생활의 우렁찬 구령소리가 메아리치는, 훈련을 위해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통신망을 구성했던, 전국 각지의 젊은이들이 모여 2년 반동안 강제로 사투리 연수를 받던 장소이기도 하고요. 회사에서 제공하는 저렴한 휴양소가 있기도, 유명해지지 않길 바라는(가게 사장님 죄송합니다…) 따끈한 모두부와 슴슴한 막국수를 파는 가게와 살짝 데친 문어를 담백한 국밥 위에 얹어 내어 주시는 맛집이 있어 늘 찾게 됩니다.


아내의 건강사정으로 인해 아이를 낳고 한동안(이라고 하기엔 10년이 넘는) 장거리 여행이 어려워서, 한 시간에 한 번씩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도 반나절 안에는 도착할 수 있는 장소인지라 매년 서너 번 정도 찾아갑니다. 종종 가는 곳이다 보니, 가보지 않은 스폿을 찾는 자와 늘 가던 곳으로만 발길을 인도하는 자 사이에 놓인 집안 서열 3순위인 저로서는, 베스트 드라이버와 짐꾼, 프로결제러, 일정관리자 정도의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의견을 내놓기보다 결정에 응해주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기억되는 장소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낙산사입니다. 여수 향일암, 남해 보리암, 부산 용궁사에 이어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바다에 면한 사찰인데요. 군생활 시절엔 가보지 못했어요. 하필 제가 근무하던 중에 불이 났었거든요. 2005년 4월 4일이었을 겁니다. 다음날이 빨간 날 식목일이라(그땐 공휴일이었습니다.) 소대장들끼리 맥주 한 잔 하고 퇴근했다 화재진압(군인들이 무슨 화재를 진압할 수 있겠습니까...) 한다고 새벽에 호출되었거든요. 사람이 서있기 힘들 만큼 부는 바람이 무서웠고, 화마가 지나간 자리는 지나갔음에도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하튼, 조촐한 가족 구성원들의 체력을 안배해 드리느라, 어디든 10분 이상 올라가야 하는 곳은 피하는 편입니다. 낙산사가 그런 곳이에요. 근데 그 10분을 꼭 한 번 들러보고 싶다는 아빠의 바람이 안타깝다며 아이가 동행해 주었습니다. 한 손엔 물병을, 한 손엔 아빠 손을 꼭 쥐고요. 그 끝자락엔 너른 바다를 등지고 중생의 안녕을 바라보던 해수관음상과 기도를 올리는 인파가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낙산사, 10분을 참고 올라온 아이에게 감사


두 번째는 하조대입니다. 양양 팔경 중의 하나라고 하던데. 조선 건국 공신이던 하륜과 조준이 놀러 오던 곳이라 두 분 성을 따 하조대라 하던데. 저는 그것 말고 성수기의 군 휴양소로 하조대를 기억합니다. 여름이면 군장병들을 위한 프라이빗(?) 해수욕장으로 운영하던 곳이거든요. 그 운영을 위해 소대원들 절반을 한 달 반 정도 보내야 하는지라, 여름 땡볕에 더 시커멓게 그을렸을 친구들을 위문하러 다녔습니다. 하조대의 일출과 절경이 무색할 만큼 부대 안에 있을 때보다 되려 밝아져 있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곳이에요.


#2005년의 하조대, 다들 무탈하시길.


마지막은 속초 동아서점입니다. 몰랐어요 속초에 이런 서점이 있다는 걸. 『 당신에게 말을 건다 』라는 에세이를 보기 전까지는요. 할아버지, 아버지를 이어 한 자리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김영건 사장님(작가님)의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마케팅 회사에서 지쳐갈 때 즈음 아버지의 제안으로 덜컥 서점을 이어받아 운영하겠다 결심한 순간부터, 책이 있고 사람이 있고 온기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만권의 책을 받아 밤새 서가를 다시 배치하고 아내의 손글씨로 폰트를 만들어 책소개를 덧대는 시간들이 온전히 이 에세이에 담겨 있어요. 물론 책을 읽지 않고 들르더라도 동아서점은 여러분을 반길 겁니다.

동아서점에 들를 때면 서점에 들어서기 전부터 특유의 힌트를 내비친다는 '서점 여행자'이고 싶지 않아 찬찬히 비치된 서가를 둘러보는 편입니다. 장바구니에만 담아두었던 책들을 분명 온라인으로 주문해도 되지만, 굳이 사장님께 여쭤보고 책을 찾아 달라고도 하고요 ㅎㅎ 단골손님뿐만 아니라 들고나는 손님들을 최대한 기억하고 세심하게 응대하시는 사장님 이라서요. 단골손님까지는 아니지만 가끔 올 때마다 서점을 찬찬히 둘러보며 응원해 주는 손님으로 기억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보곤 합니다.


#속초동아서점, 분명 저 아이가 사장님의 따님인 것으로 압니다.


다음 주에도 짧지만 속초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그곳에 나를 기억해 주는 무언가가 있어, 동아서점 자동문을 누르고 있겠죠?


속초에는 닭강정도 있고 동아서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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