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있을게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모두들 가는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그간 지나온 자취에 대해 정리 또는 회고를 한다거나, 앞으로 행할 여러 활동, 다짐, 자신 또는 타인과의 약속, 새롭게 만들려는 습관이나 루틴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작심삼일을 백 번쯤 행하면 일 년이 다 지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저도 (매년 그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스티브 잡스나 워런 버핏이 될 것만 같은 계획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메모장과 캘린더를 주섬주섬 살피며 지나간 시간을 복기해 보다 이불킥을 하게 되는데요. 그나마 놓치지 않고 정리하는 일 중에 하나가 ‘책’입니다.
네, 책.
1년에 150권쯤 사고 100권쯤 읽기를 갈망하지만 늘 실패하느라, 좁은 집구석 더 비좁게 만들 거면 그냥 침대로 만들어 쓰라는 아내의 핀잔을 귓등으로 넘기는 신공으로 감내하면서도 책 수집가 다운 면모를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그 책이요. 그렇다고 정리랄게 뭐 특별한 건 없습니다. 다 읽은 책들 중에 ‘그저 좋았더라’, ‘평생 이고 지고 갈 녀석’, ‘오 흥미로운데?’ 정도의 감흥을 나름의 별점으로 표시해 둔 목록을 정리한다거나, 줄 긋고 따로 적어두었던 메모들을 온라인으로 옮겨두며 한 번 더 지그시 눈에 담는 정도인데요.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팔아야죠.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다 팔 책 선별작업을 3회에 걸쳐 진행한 바 있습니다. 출근용, 퇴근용, 화장실에서, 주말에, 가끔의 여행지에서 정도로 나누어 한 번에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 편이기도 하고요. 오각형이나 육각형 차트로 표현한다면 대못은 만들 만큼 독서편력이 심한 편이다 보니 다 읽지 못하고 책장의 뒤안길로 영면한 녀석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먼지는 쌓여가고, 쌓인 먼지만큼 기억 저편에 놓일 바에야 치킨하고 바꿔먹지 하는 심정으로 선별 작업을 마치고 나니 90권쯤 되더라고요. 이번에는 아이도 동참해서, 본인이 뜯을 닭다리는 내 책판 돈으로 먹어보겠다 다짐한 듯 고르고 골라 판매점까지 들고 나를 제 승모근 활성화에 보탬이 되어 주었달까요.
지근거리에 대형 중고책 판매점이 있습니다. 쌀 반 가마니 무게는 될듯한 책 꾸러미를 내려놓고 번호표를 뽑을 때는 ‘이 정도로 책을 많이 보는 사람이지’ 하는 뿌듯함과 ‘요즘 경제가 많이 어렵긴 한가 봐’ 하는 주변의 시선이 교차하는 것 같아 표정을 숨겨준 마스크가 고맙게 느껴지곤 합니다.
차례가 되어 가져온 책을 하나하나 올려두면, 셜록이나 코난 정도로 빙의한 지 의심될 만큼 직원 분이 주도면밀한 시선으로 등급을 나누는데요. 책의 상태에 따라 최상, 상, 중으로 분류되며, 매장에 재고가 많다거나 상황에 따라 매입이 안될 수 있으니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는 멘트는 이제 저도 외울 수 있습니다.
분명 그동안 얌전하게 다룬듯한데, 잘 관리했을 것이란 생각은 저만의 착각이었나 봐요. 오래되어 용지가 바래졌다거나 독자들이 더 이상 찾지 않아 매입이 어려운 책들 하며, 책갈피나 포스트잇이 사이에 포개져 있는 건 애교스럽고요. 곁에 두고 도대체 뭘 먹은 건지 얼룩이나 이물질이 묻은 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쑥스럽기까지 하더군요.
그러고 나면 매입이 가능한 책과 폐기될 책이 나뉩니다. 폐기될 책은 보통은 미련 없이 보내주는데요. 서너 권쯤 폐기될 책 중에 이번엔 자꾸 눈에 걸리는 게 있더라고요.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가 쓴 『클라라와 태양』이라는 소설이 그러했습니다. 분명 일본 이름이지만 영국사람이에요. 6살에 이민을 가셨거든요. 심지어 1989년에는 부커상을, 2017년에는 노벨상을 수상하신 분입니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 내놓은 첫 장편소설이란 책 소개에 혹해서 집어 들고 뿌듯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AF(Artificial Frend)라는 인공지능 로봇을 매장에서 구할 수 있는 머지않은 미래의 이야깁니다. 클라라가 주인공이에요. AF이면서 매장에서 자신이 팔리기만을 기다리는데요. 철 지난 기종이어서 그런지 찾는 사람이 없어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제게도 비슷했었나 봅니다. 철 지난 SF소설 같았달까요. 1/3 쯤 읽다 저와 맞지 않는 듯하여 찾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마치 이게 운명이라는 듯, ‘아니다 너는 나를 제대로 안 본 거다’며 다시 보라고 책표지가 절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데려와 버리고 말았죠.
책에도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이클이라고 해야 할까요. 작가의 마음에서 피어난 시점부터 독자의 손에 놓이고, (오프라인 책에 한해서) 그 종이로서 역할을 다하기까지 일련의 시간들이 놓여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클라라와 태양』 은 책장 구석에서 잊혀 있다 팔릴 뻔하였으나, 원치 않게 몸에 묻은 얼룩으로 제게 다시 돌아오는 이 과정이 어찌나 사람의 생애와 비슷해 보이던지요. 마치 제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며 건네는 인사는 아녔을는지.
읽던 책들이 남아 있어 아직 시작하진 않았습니다만, 『클라라와 태양』 만큼은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있으려고요. 93,800원의 매입금을 고이 넣고 돌아오는 길목에선 이런 노래 가사가 들려왔습니다.
‘약속하고~ 만나고 헤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