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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모사 1867 - 첸야오창, 대만산책 - 류영하

망했어, 두고 왔나 봐

by 세잇

꼭 14년 만이던가. 신혼여행 이후로 해외에 다녀온 것이. 5학년 딸아이에겐 첫 해외여행이기도 했고. 전투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바빴다고 하기엔 핑계 같고, 궁핍한 가계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참았다 하면 궁상맞을 만큼 긴 시간은 아녔을는지. 그보다는 학업으로 부모보다 더 바빠지기 전에, 지칠 때마다 문득문득 떠올려 혼자 피식 웃을 힘이 되어줄 에피소드를 아이에게 심어주고 싶단 바람이 더 컸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여행 가겠다 마음을 먹고, 7개월 전부터 셋이 나란히 앉을 보딩패스를 끊으면서 타이베이 여행은 시작되었었나 보다. 여행지 선택에 특별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비행기 이착륙과 흔들림으로 인한 공황장애 아닌 공항장애를 겪는 아내를 고려해 2-3시간 안에 닿을 수 있으면서, MBTI로 따지자면 J의 저 끝에 가 앉아있는 가족구성원들이다 보니 구석구석을 제 발로 돌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휴양지가 아닌 여행지이면서, 셋 다 언어에 대한 달란트를 각자의 엄마 뱃속에 두고 태어난 관계로 손짓발짓 다 엮어가며 그래도 경찰서는 가지 않을 수준으로 소통할 수 있는 선택지가 타이베이었나 보다. (쓰고 보니 까탈스럽구먼…)


여행은 준비과정부터 이미 떠난 것이라고 하던가. 일자별 여행루트는 500번쯤 갈아엎었고 향신료 냄새와 물갈이로 인한 배앓이, 의외로 춥다는 여러 커뮤니티의 실시간 댓글에 힘입어 한 번도 쓰지 않을 소품들로 가득했던 캐리어를 이고 진 타이베이. 짧은 여정을 마치고 돌아와 톺아보니 좋은 경험을 가지고 온 줄 알았으나 두고 온 게 많아 이야기해보려 한다.




1. 온기

『포르모사 1867』, 대만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계기가 되어 준 책인데, 픽션 위에 논픽션을 쌓아 올린 것이 픽션보다 더한 픽션이 되었달까. 1867년 미국의 로버호에 탑승한 십여 명의 선원들이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나비효과가 되어, 흩어져 살던 원주민들이 규합하고 서양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남갑지맹’ 이라는 조약을 체결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된 놀라웠던 점 중의 하나가 대만인의 구성에 대한 내용인데, 현재 대만 인구의 2% 정도라는 대만원주민이 그렇게나 다양하더라. 숙번, 생번, 토생자, 객가인, 북노인 등으로 불리는 구성이며, 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본성인과 외성인으로 구분되는 한족들까지 뒤섞여 독특한 생활상과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본다. 대만 원주민들은 에크로네시아인에 가깝다고 하던데, 하와이나 마우이에서 마주함 직한 분들을 타이베이의 이곳저곳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온기냐 하면, 먼저 다가서진 않지만 손을 내밀면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건네주었던 사람들이 자꾸 눈에 걸려서. 달달 외운다고 외웠으나 한 두 달 만에 섭렵한 여행 중국어가 얼마나 어설펐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답해주려 하고, 한국인 인걸 알아채면 온갖 아는 한국어를 섞어가며 소통하려는 모습이 얼마나 고맙던지. 레스토랑 예약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급하게 여린 팔을 휘저어 잡은 택시엔 번역기를 먼저 내밀던 기사님이 계셨고, 잠시 숙소를 비우려는데 언제 오는지 한국어로 물어보는 직원이 있었고, 가격이 얼만지 묻는 질문에 계산기를 스윽 내민다거나 영어로 된 메뉴판을 달라는 서툰 중국어에 영어를 할 줄 아는 따님을 부르시던 사장님까지 계셨으니, 그 온기에 취할 수밖에.


2. 습기

대만은 경상도 만한 섬나라지만 따뜻한 남쪽이다 보니 서울은 한겨울인데도 곳곳에 풍성한 반얀트리며 녹나무, 고무나무를 만나고 왔다. 파-워킹이 장착된 지라 발길 닿는 대로 둘러보다 보니, 그저 많이 걸어 더운 줄 알았고 그래서 땀이 찼구나 싶었으나 선선한 날씨에도 공기 중에 머금은 습기로 인해 한 두 번은 옷을 갈아입었더랬다. 대만은 건기인 겨울에도 비가 많이 온다던데. 다행스럽게도 머무는 내내 택시에서 맞은 소나기가 전부여서 행운이 따르는구나 싶었지. 대만은 이 습하고 비 많은 날씨 덕분에 비가 와도 우산 없이 다닐 수 있도록 대부분의 건물이 필로티 구조로 지어져 있다. 예보에 비소식이 없는 날임에도 꼬깃한 장우산을 지팡이 삼아 발걸음을 옮기던 어르신의 뒷모습을 한껏 담았다.

#어디에서나 만나게 되는 필로티 구조의 건물, 그리고 우산 어르신 ㅎㅎ


3. 아기자기

일본 식민지 시절을 겪어서 인가. 원래 그런 것인가. 소품샵이 즐비한 융캉제나 19세기 개항하며 무역의 중심지역으로 자리 잡았던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디화제만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무심히 자란듯한 길가 화단에 놓인 장난감 오리가족이며, 한잔만 주문해도 챙겨주던 버블티 스티커, 얼마 남지 않으면 걸음을 재촉하는 횡단보도 신호등, 이제는 전 세계 국룰이 되었는지 등굣길 가방마다 흔들리던 인형들까지 온통 아기자기함으로 무장해 마음을 녹인다.

백석대학교 중국어학 전공교수이신 류영하 교수가 쓴 『대만산책』을 여행 전에 알게 되어 조금 더 대만을 이해하고 바라보지 않았나 싶다. 중화민국(대만) 정부 초청으로 국립칭화대학 대만문학연구소에서 강의를 하러 대만에 머물 당시 먹고 걸으며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한 책인데, 대만 사람들의 아기자기함을 이렇게 소개한다.


타이베이에서 여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탄 적이 있다. 그녀는 대만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바로 사람들이라고 자랑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대만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라고 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친절하고 따뜻하다는 것이고, 캐릭터는 그것의 또 다른 구현이다. 대만의 캐릭터에는 조금 더 친절하고 따뜻하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담겼다.


작가는 책에서 노숙자를 가우(거리의 친구)라 부른다거나, 한국인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소시지와 햄으로 부대찌개를 만들었듯이 대만 사람들은 미제 소고기 통조림으로 소고기 면을 만들었고 그게 우육면이라는 이야기도 소소하게 전한다.

발길 닿는 곳마다 숨길 수 없는 아기자기한 귀여움이 한가득.

# 조개로 모자를 씌운 화단의 오리가족들, 학생들 가방에 달린 인형은 한국이나 대만이나...


4. 지키기(응?)

(뭔가 똑 떨어지는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뭐랄까, 약속을 잘 지킨달까. 규범이나 규칙을 잘 지킨달까. 도덕적이고 예의가 바르달까.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나라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오토바이 속에서도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신호를 기다리는 자동차 운전자들의 속내가 궁금할 때 즈음 초등학교 하굣길을 지키던 아버지회의 등짝이 서서히 믿음직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코로나로 힘들었던 시기가 지났음에도 누구나 마스크를 쓰던데.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은 여행자이거나 노숙자인 확률이 높아 보였달까) 언뜻 생각나는 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기승을 부려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가 넘쳐날 때 유독 대만은 한 두 자릿수로 유지했다던 기사가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사찰에선 관세음보살, 관우, 마조, 화타와 같은 여러 신들에게 풍요와 안녕과 건강을 진심으로 기도하던 사람들에게서 지키고 싶은 마음이 전해졌달까. 마조신은 『대만산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글자대로라면 '엄마 같은 조상'이란 뜻이란다. 마조의 신도는 대만인구의 60%쯤 된다던데. 나도 뭐라도 빌걸 그랬나.


5. 감기

4박 5일의 일정을 3박 4일로 바꿀 만큼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도착한 첫날엔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나 자꾸만 꾀병인가 싶게 열이 난다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는데, 이튿날부터 정말 열이 나기 시작했다. 예정된 투어는 모두 취소를 했고, (무용한 것만 한 가득인가 싶었는데) 다행히 가져간 상비약에 해열제가 있어 두 종류를 번갈아 가며 먹이고 달랬더랬다. 아픈 걸 참아가며 버티던 아이. 엄마 아빠가 본인 때문에 여행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며 침대시트에 쏟은 눈물은 한 바가지쯤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열제로 인해 속이 거북할 텐데도 입에 맞지 않은 먹거리들을 불평 없이 감내한 마음이 닿아 미안하다. 잠깐씩 컨디션이 좋아질 때면 오래 걷지 못하면서도 꾹 참고 걸으며 전해준 아이의 애쓴 시간이 고맙기도 하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들른 병원에선 독감을 타미플루 없이 쌩으로 버틴 게 대단하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스스로 어깨를 으쓱해하더라니. 많이 컸다. 운이 없었지. 다음엔 괜찮을 거야. 토닥토닥.

#말하지 않아도 안타까운.




포르모사,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르투갈어란다. 포르투갈인들이 이 섬을 처음 발견하면서 붙인 이름이 포르모사라고 하더라. 그리고 대만은 그렇게 산이 멋지다고 하던데. 그래서 대만사람들의 산부심이 남다르다고 하던데. 그로 인해 산에 살던 원주민들이 고기 다루는 솜씨가 기가 막혀서, 아픈 아이를 위해 오픈런했던 백종원의 푸드 스트리트 파이터에 소개된 황가소시지가 또 생각나는데.


이 아름다운 섬에 두고 온 것이 이렇게나 많구나. 언제고 그리워질 때, 사진과 이 글을 꺼내보고 처음보다는 조금 더 가볍게 떠날 채비를 하고 다시 만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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