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완전하기에
가끔은 마음을 지키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와 너무 가까워져 생기는 마찰. 거슬리는 말투나 제스처로 인해 생기는 의아함, 대화를 잘 주고받았다 생각했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오해, 그로 인해 쌓여만 가는 기대와 실망의 반복. 가까운 만큼 더 조심스러워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다치게 되는 관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약간의 거리를 둔다』라는 책을 펼쳤을 때, 저는 이미 그 문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져 서로에게 어느덧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진 덕분에 문제가 생긴다. 어머니 말씀처럼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둬 통풍이 가능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듯싶다. 서로의 신상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금물이다. 신상을 털어놓는 그 순간부터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착각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특별한 관계로 인한 착각. 종종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고 감정인 듯합니다. 사랑이나 우정,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너무 깊이 알고 있다고 착각할 때 오히려 상대의 고통이나 어려움에 무감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 어머니 이야기처럼,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두어 통풍이 가능해지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람이 들어올 틈. 관계가 충분히 흐를만한 사이. 그 간격과 거리감으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고, 타인의 세계를 인정할 수 있는 시야도 갖게 됩니다.
이 책을 쓴 소노 아야코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안타깝게도 올해 초 93세의 나이로 멀리 떠나셨어요. 『인간의 분수』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된 이 에세이는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이후 『약간의 거리를 둔다』라는 제목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어조는 읽는 이를 멈춰 서게 만듭니다. 너무 평범해서 놓치기 쉬운 생각들을 무릎 탁 치게 만드는 문장으로 길어 올리는 작가. 저는 그런 작가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든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을 좋아하면 된다.”
이 문장은 어쩌면 지극히 단순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좋아하는 일’이라는 말에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그 일을 잘 해내야 하고, 타인에게도 인정받아야 하며, 지속적인 동력을 가져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지요. 그렇게 되지 못하면 좋아하는 일이 아닌 것 같고, 실패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소노 아야코는 이 순서를 뒤집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태도 속에서 삶의 의미가 싹튼다고 말이죠.
무언가를 갈아치우듯 일상이 늘 새롭게 바뀌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서, 지금 선 그 자리에서 조금씩 정을 붙이고 의미를 발견해 보는 것. 때로는 그것이 삶을 더 단단히 붙잡아주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남들만큼’이란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무엇을 근거로 ‘남들만큼’의 존재라고 부르는 것인지, ‘남들만큼’의 허용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기준은 없다.”
이 문장을 읽으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 긴 한숨이 나왔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남들만큼’이라는 잣대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아서요. 남들만큼 벌어야 하고, 남들만큼 인정받아야 하고, 남들만큼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남’은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고, 어딘지 모르게 추상화된 타인의 평균이고 내가 만들어낸 이상한 기준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 평균에 맞추려는 삶은 늘 자신을 바깥으로 밀어내게 만들죠.
결국 중요한 건 그 불분명한 기준이 아니라, 내 안에서 명확해지는 삶의 기준이지 않을까요. ‘나만큼’ 행복하고, ‘나만큼’ 괜찮은 오늘을 살아도 된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이 먼저인지도 모릅니다.
“그중에서도 인내가 가장 필요한 곳은 사랑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줘야 할 때다. 상대를 소중히 생각한다면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견딘다.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인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간을 받들어주는 힘이다.”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선 언제나 감정이 고조되어야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따스함이나 설렘이 가라앉으면 멈추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문장은 그런 생각을 조용히 반박합니다. 사랑이란 결국 상대가 내 기대에 어긋나더라도, 실망스러운 말을 하더라도 떠나지 않고 곁을 내어주며, 나무처럼 굳건히 지키려는 태도라는 것이죠. 인내라는 말은 자칫 고통을 수용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것은 사랑을 위한 가장 주체적인 선택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사람 자체를 포기하지 않으려 애쓸 때, 비로소 인간적인 깊이와 품을 배우게 되는 건 아닐까요.
“노인의 불행은 누가 나를 부축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부축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순간 불행해지는 것이다.”
이 문장은 단지 노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배려가 부족한 순간 우리는 쉽게 서운함을 느끼고 불평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실제로는 결핍이라기보다 ‘받아야 할 것’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기대를 내려놓는 순간 삶은 훨씬 가벼워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불행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행을 택하는 방식으로 삶을 바라볼 때 그 표정은 더 어두워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불평하는 마음 대신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주도한다는 감각을 되찾는 일이 절실해 보입니다.
소노 아야코의 문장들은 조용하지만 단단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삶의 조언이나 처세의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 앞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고, 피하지 않은 사람의 문장이었습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차갑게 등을 돌리는 일이 아니라
관계 안에 공기를 불어넣는 일이었습니다.
숨을 쉴 수 있게 하고
나를 지키며
상대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아주 작은 배려.
그 작은 배려가 나에게는 커다란 자유이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되어주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람들 인지 모릅니다.
완벽하게 사랑할 수도 없고
완벽하게 이해받을 수도 없는.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거리일 수 있습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서로의 결핍을 인정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런 거리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적당한 거리라는 이름의 다정함을 믿어보려 합니다.
그 거리를 지키는 것이
나와 당신의 자리를 지키며
서로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