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장이 하는 일은
매년 이런저런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챙겨보는 편입니다. '한 놈만 패'는 편협한 독서습관으로 인해 관심 가는 작가분들을 탐색하는 시작점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수상작품집'이잖아요. 얼마나 많은 작가분들이 수상과 등단을 바라며, 수많은 낮과 밤을 글과 사유에 매달리다 세상에 내놓았을까 싶어서 찾습니다. 아, 다른 책에 비해 반값 정도로 저렴하다는 것도 한몫하겠네요 :)
수상작품집을 읽다 보면 그 해의 문학 지형도를 가늠해 보게 되는데요. 흐름이 어떻게 오고 가며, 어떤 이야기가 울림과 메시지로 주목받았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2025)』을 펼치고 눈에 띈 건 작가분들의 성별이었습니다.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나눈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수상작가 일곱 분 중 여섯 분이 여성작가시거든요. 좀 오래된 듯합니다만, 여성 작가분들이 문단의 가장 선명한 자리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두드러진다’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이미 중심이 되어버렸다는 생각도 하고요.
'내가 사랑한 작가들' 연작을 요즘은 잠깐 쉬고 있긴 한데, 사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며 연작으로 다루고 싶은 작가분들의 70% 정도가 여성작가분들이긴 합니다. 세상이라는 혼탁한 그림 앞에 섬세하고도 때론 날카로운 터치로 삶과 주변을 이야기하는 문장들에 공감되기도 하고, 제가 그 결에 잘 맞는 듯싶어서 말이죠. 앞으로도 권여선, 김금희, 최은영, 조남주, 정유정, 최승자, 정혜연, 한강, 정한아, 장은진, 클레어 키건(은 스코틀랜드?), 이기호, 천명관(은 남성?) 등의 작가분들에 대한 연작을 고민 중인데, 제가 생각해도 높은 비율이긴 하네요.
여하튼, 이번 수상작품집 속 일곱 편의 소설은 서로 다른 색을 지녔지만, 어딘가 비슷한 결로 이어져 있습니다. 관계를 견디는 사람들, 몸과 마음을 다친 채 일상을 건너는 사람들. 쓸쓸하지만 찬란하게 그려낸 문장들이 모여 있었죠. 인상 깊었던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저는 현호정 작가의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 』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왜였는지 짧게 설명드리자면, 낯선 문장과 마주했을 때의 찜찜하고도 묘한 매력이 느껴졌달까요.
“그냥 거기까지의 고통. 왜냐하면 또 통곡하고 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엔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다친 데가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문장이 출렁입니다. 파도처럼 밀려오고 정돈되지 않은 리듬으로 인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몸과 혼이 따로 떠다니는 사람들. 이들을 덮치는 고통과 기억,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나라는 존재. 읽는 동안 황정은 작가의 문장들이 떠올랐어요.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신체의 언어로 말하는 문장들. 이상하게 쓰이기 위해 고르고 벼른 흔적이 역력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문장으로 보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낯선 정서를 통과시킬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 있던 모든 것 멸종한 뒤라, 물리적으로 싹 거둬간 자리 숫제 체로 쳐서 훑어간 데를 방류된 화학물질이 거꾸로 한번 더 태운 보람 쏠쏠하여서, 여지 아주 없었고 많았어도 그래. 사람이 물속에서 맨눈으로 끔벅끔벅. 대단히 뭐 뵈는 게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그 물이 맑았을 리 만무하지요. 기원후부터 이천오백 년 넘게 쌓인 쓰레기들이 이제 뭐 국적도 없겠다 가격표 떼고 골고루 흩어져 조각나 부서져 순환하다 엉겨 붙고 녹아들고 빛 반사하면서 바다 전체를 로맨틱한 분위기의 배스밤이 녹아든 밸런타인 욕조처럼 미끌미끌하고 반짝반짝하게 무엇보다 새카맣게 만들었으니까요”
이 문장 또한 한참을 멈춰 있었습니다. 문장이 주는 충격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거든요. 멸종 이후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혼탁한 물 속을 '로맨틱한 분위기의 배스밤이 녹아든 밸런타인 욕조'라는 표현을 쓰는 이 대조법의 묘미라니. 절망적인 현실을 아름다운 은유로 포장하면서도, 그 너머에서 스며 나오는 절망감이 덧대어져 더욱 선명해 보였습니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수상작들도 각각의 방식으로 '견디는 사람들'을 그려냈습니다. 성해나 작가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에서는 팬심과 도덕적 딜레마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을, 성혜령 작가의 「원경」에서는 질병 앞에서 무너지는 관계를 다뤘죠.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드보드지처럼 두껍고 견고한 사랑도 있을 테지만, 대개의 사랑은 습자지 같아서 단 한 방울의 반감과 의심으로도 쉽게 찢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푹 젖어도 찢어지지 않고 도리어 곤죽처럼 질퍽해진다. 사랑이고 죄의식이고 찬미고 경멸이고 죄다 흡수해 종내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로"
사랑을 종이에 빗댄 이 은유가 참 절묘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흔히 사랑은 견고하다, 사랑은 영원하다 말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쉽게 찢어지고 상처받는지를 성해나 작가는 습자지라는 일상적인 소재로 치환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곤죽처럼 질퍽해진다'며, 사랑의 복잡하고 혼탁한 면까지 드러내죠. 사랑에 대한 죄의식, 찬미와 경멸이 뒤섞여 원형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 이런 감정의 복잡성을 이렇게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표현한 문장을 보면서, 좋은 문장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혜령 작가의 「원경」에서도 마음에 남는 문장이 있었어요.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십 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 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가 끝나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이 문장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안면 마비로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동료가 다른 쪽 입꼬리도 일부러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런 동료를 보며 이직을 결심하는 주인공의 마음. 여기에는 연민과 동시에 자신도 언젠가 그런 처지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런 현실을 견딜 수 없다는 솔직한 마음이 모두 담겨 있어요.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서 저는 문학이 왜 필요한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지만 잘 들여다보지 않는 순간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이렇게 섬세하고 정확한 언어로 포착해 내는 것.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아, 나도 그런 마음이었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좋은 문장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수상작품집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받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절망적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웠고, 슬프지만 희망적이기도 했어요. 그 상처받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여전히 무언가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몸이든 마음이든, 크든 작든 모두 조금씩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안고 일상을 통과해 나가죠. 때로는 현호정 작가의 문장처럼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성해나 작가의 문장처럼 사랑이 '곤죽처럼 질퍽해져서'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함께 나아가는 것 같아요.
일곱 편의 소설이 모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결국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와 가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들, 따뜻한 연대의 가능성들이 우리를 지탱해 준다는 것이죠.
좋은 문장이 하는 일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드러내고
혼자만의 경험이라 믿었던 순간들이
실은 많은 이들의 마음과 겹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
그 문장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위로와 용기를 얻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