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포인트]
꽃이 좋아지면 나이 든 거라고들 말한다. 나도 이십 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꽃이 좋아졌다. 꽃을 보면 멈춰 서서 사진도 찍고 괜히 쓰다듬어본다. 꽃은 객관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존재지만 지천에 널려있어 저평가 받는다는 점에서 인생과 비슷하다. 별을 안고 싶어 멀리 떠났지만, 결국 소중한 건 옆에 있다는 걸 깨달은 조용필처럼,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인생을 알 때쯤 그 진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 아닐까.
돈다발도 좋지만, 꽃다발만큼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다. 그냥 브이하고 찍은 사진과, 한쪽 팔에 꽃다발을 들고 브이한 사진은 다르다. 먼 훗날 손녀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이게 할미의 젊은 시절 사진이야'라며 사진 앨범을 뒤척이게 된다 해도, 단박에 특별한 날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함을 선사하는 꽃다발을 더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나는 꽃시장에 간다. 아침 일찍 남대문 화훼시장에 가면 제철인 꽃들이 마치 수산 시장 생선처럼 쫙 깔려있다. 두껍고 투박한 잎을 가진 노오란 국화부터 물을 머금은 듯 여리여리한 잎을 가진 수입 생화까지 마치 화려한 패션쇼 같다. 제각기 다른 채도를 뽐내는 꽃들에 홀리지 않으려고 정신을 단단히 차리며 선물하고자 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꽃을 고른다. 그리고 도매업자가 아닌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짐짓 무심한 목소리로 '사장님~ 한 단에 얼마예요~'라고 묻는다.
꽃다발을 사러 꽃시장까지 가는 이런 유난스러움은 내가 최초로 받은 꽃다발로부터 시작되었다.
포천에 살아서 포천할머니라고 불리었던 나의 친할머니는 동대문에서 20년간 장사를 하셨다. 얼굴은 무척 잘생겼지만 술 좋아하고 돈 벌어올 줄 몰랐던 할아버지 때문에 할머니는 집안의 가장이셨다고 한다. 고단한 삶을 사셨지만 아주 멋쟁이셨다.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 때 포천할머니가 꽃다발을 사다 주시기로 했다. 아마 시장의 생리를 잘 아는 할머니는, 꽃집보다 훨씬 싱싱하고 좋은 꽃을 손녀에게 선물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유치원 졸업식 때 사탕 바구니 밖에 받아본 적 없던 나는 생애 첫 꽃다발을 받아볼 예정이었다. 외할아버지의 경찰 퇴임식 때 화동 역할을 맡아 소라빵 머리를 하고 꽃을 전달 드린 일을 제외하고는 꽃다발을 구경할 일이 없었다. 아쉽게도 아빠는 엄마에게 꽃다발을 선물해 주는 류의 남자가 아니었다. 외박하고 다음 날 아침에 장미꽃 한 송이를 사 와 아내의 화를 더 돋우는 남자였다.
생애 최초 내 명의로 된 꽃다발을 받을 예정이었던 나는 옅은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졸업식날 새벽에 시장에 가서 꽃을 사서 졸업식에 오겠노라 말씀하셨다. 석사 졸업도 아니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꽃다발이 두 개나 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엄마 아빠는 따로 꽃다발을 준비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졸업식에 늦으셨다. 아이들이 모두 품에 꽃다발을 안고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듣고 있었고, 할머니는 멋진 갈색 트렌치 코트를 입고 체육관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품에는 신문지로 싼 프리지어를 한 아름 안고 계셨다. 신문지를 본 엄마는 질색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마 졸업식에 늦어 포장을 못하고 오신 모양이었다. 한달음에 꽃다발을 낚아챈 엄마는 난처해하며 신문지를 접어 꽃이 잘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엄마는 훗날 이날을 속상했다고 회고했다)
막상 꽃을 받은 당사자는 멀뚱했다. 별로 개의치 않았다. 친구들이 받은 핑크 파랑꽃보다 내 노란 프리지어가 더 예뻤다. 온갖 시끄러운 정치적 문제가 담긴 신문지에 싸인 가장 예쁜 프리지어였다.
그때의 할머니처럼, 지금의 나는 꽃다발을 사러 꽃시장에 가는 사람이 되었다. 마치 그때 할머니의 꽃다발이 맞았다고 증명이라고 하듯 말이다.
나에게는 꽃시장보다 꽃집에서 꽃다발을 사는 것이 더 어렵다. 꽃집은 바깥에선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막상 들어가게 되면 쭈뼛거리게 된다. 서브웨이에 처음 가본 인간처럼 식은땀이 나고, 눈이 빠르게 돌아가고, 꽃집 주인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기가 어렵다. 가격대가 불투명하고, 꽃 컬러와 포장지까지 디자인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렵다. 또 자존심에 '알아서 해주세요' 같은 말을 하기는 싫어서 더 쭈뼛거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쭈뼛거림은 처음에 꽃다발을 사고자 했을 때 먹었던 마음과 충돌한다. 무언가를 축하하고자 하는 기쁜 마음으로 사는 것인데, 꽃집에 가서 쭈뼛쭈뼛 적당한 가격과 디자인을 골라 꽃다발을 사는 것은 부합하지 않는 일로 느껴진다.
그리하여 나는 회현역 5번 출구에서 내려서 화훼시장까지 걷는다. 사람과 꽃으로 빽빽한 시장을 돌아다니며 선물할 상대에게 어울리는 꽃을 고르고, 어울리는 포장지 색을 고민해서 꽃다발을 완성한다. 이렇게 유난스러운 정성을 쏟을 만큼 꽃은 특별하다고 믿는다.
▲ 남대문 화훼시장의 모습. 생화 매장은 새벽 3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늦은 오전에 가면 대부분 문을 닫는다. (대신 운 좋게 할인 상품을 얻을 수도 있다.)
▲ 꽃은 '한단' 단위로 판매하며, 투명 포장지로 감싼 꽃을 신문지로 길게 싸준다. 저 꽃은 한단에 만원 줬는데 물주머니가 없어서 몇 시간 만에 보기 싫게 상해버렸다. 역시 비싼 꽃이 더 예민하다.
▲ 남대문 꽃시장에서는 오천 원이면 화려한 꽃다발 포장을 해준다. 여러 번 다녀봤는데, 여자 사장님께 받는 게 성공 확률이 더 높다.
▲ 꽃다발을 들고 지하철을 타면, 어머님들의 관심과 호감을 한몸에 받을 수 있다. 이날도 어떤 어머님 한 분이 지긋이 바라보다가 '이 꽃은 뭐예요'라고 말을 걸어오셨다. 남대문 꽃시장에서 해왔다고 하니 너무 예쁘게 잘 골라왔다고 칭찬하시다가, 마지막엔 미국에 유학 중인 당신 딸 자랑으로 마무리하시고 열차에서 내리셨다.
▲ 대학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셀프로 만들었던 꽃다발. 꽃다발을 만들 때 보색 팔레트를 알고 가면 색 조합이 쉽다. 노랑과 보라를 염두에 두고 만든 꽃다발이다. 확실히 시장표 꽃다발만의 넉넉함과 싱그러움이 있다.
주간 에세이 {이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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