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마다 찾아오는 회의감 1편
빌릴리릴리 - ♫ ♩ ♪ ♩
대기업에 다니는 대학 동기로부터 온 전화였다. 야무지고 멋진 친구 J는 휴학 한번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광고회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이직 프리패스라는 대리를 달고 판교 유명 IT 대기업 마케팅팀으로 이직했다. 누구보다 회사에 진심이라고 믿었던 J는 ‘아무래도 회사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회사 생활이란 단어로 퉁쳐지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다.
인간관계, 업무, 미래, 사람, 부동산,
비전, 운동 부족, 결혼 …
둘이서 한참 회사원으로서 하소연을 하다가, 결국 친구는 웹소설 작가, 나는 에세이 작가가 되고 싶다는 장래 희망을 밝히며 실없이 전화를 끊었다.
하꼬 직작인으로서 나는 감히 생각한다.
이 세상에 회사가
적성에 맞는 사람은 없다고.
회사는 적성의 영역이 아니다. 회사가 적성에 안 맞는다는 말은 ‘백수가 적성이다’라는 말과 동일하다. 누구나 해당되는 말이므로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한 말이다. 회사는 적성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회사에 잘 적응하고 살 것인가
vs. 탈출할 것인가
그저 '회사에 적응하며 살 것인가, 혹은 탈출하여 살 것인가'의 선택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회사 다니는 게 시간 낭비라는 실언을 하고 싶지는 않다. 회사 생활이 인생의 낭비라고 불릴 만큼 배울 게 없는 건 아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사회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식당에 가서 누구보다 빠르게 수저를 깔고, 내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기가 막히게 구분해 귓구멍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다.
별 쓸모없는 거 배우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아주 근본적으로는 '책임감을 갖고 하루 할 일을 해내는 법'과 '살아온 환경과 나이대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즐거움도 분명 존재한다(주로 물질적이겠지만). 월급, 무료 건강검진, 성과급, 퇴직금. 아주 가끔 칭찬이나 인정과 같은 무형의 즐거움도 찾아온다.
죽어도 회사원이 되기 싫었으면서 어느샌가 적응해 곧 대리 진급을 앞둔 직장인으로서, 인정하겠다. 회사 다니는 삶, 나쁘지 않다. 사회의 시스템을 배우고 물질적 보상도 받을 수 있다. 인턴 생활할 때만 해도 회사의 부품이 된 듯한 기분이 미친 듯이 싫었지만, 막상 부품이 되고 나니 그 부품 역할 하기도 쉽지 않다는 걸 느낀다.
그렇지만 회사 업무를 하면서 현실 자각 타임을 가지는 순간은 매우 분명하고 치명적이다.
바로 나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될 때다.
회사에서는 회사가 바라는 결과물을 내야 한다. 내가 만든 결과물의 옳고 그름의 선택권이 상사에게 있을 때.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방식이 아닌 상사의 방식을 택하게 될 때. 결국 나의 유니크한 형태에서, 회사의 정형화된 양식으로 변할 때. 점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사라진다.
여기서 우리는 사원 나부랭이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걸 떠올려야 한다. 회의록이나 메일 작성처럼 미세한 업무에도 옳고 그름의 판단이 윗선에 있으니, 허탈함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한심해져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회사를 박차고 나가고 싶기도 하다. 상사의 기준으로 맞고 틀림이 결정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스스로 결정하고 결과물을 내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가 원하는 정제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인간이 되겠지만, 반대로 그 말은 나만의 것을 만드는 능력이 퇴화함을 의미한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분명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나 팀이 유별나서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내 또래와 회사 생활을 주제로 이야기 나눌 때마다 나오는 토픽이다.
어느 정도 직급에 오르기 전까진 뇌 빼고 일하는 게 적응에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괜히 나만의 기준을 세웠다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 점점 자기 비하적인 스탠스로 흐르게 된다. '이 정도 일도 제대로 못하다니', '나는 맞다고 생각했는데 다 틀렸구나'... 제멋대로 생겼던 원석이 갈고 닦여 정원용 동그란 돌이 되는 과정이랄까.
인턴으로서 다양한 조직을 경험해 본 뒤 내가 내린 결론은, 겉에서 얼마나 Young 하게 보이든 회사라는 근본은 똑같다는 것이다.
✓ 매우 영세한 스타트업
✓ 국내 굴지의 대기업
✓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합격하는 바람에 다녔던) 보수 언론사
✓ 트렌디하고 수평적(으로 보였던) 콘텐츠사
젊은 회사든, 보수적인 회사든, 회사라는 근본은 똑같기 때문에 구성원으로서 느끼는 페인 포인트가 크게 다르지 않다. 취업 전문가들도 '이직할 때 이 회사가 별로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면 회피성 이직을 하지 말라'라고 권한다. 다음 직장에서도 똑같은 이유로 회사가 별로라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회사는 어디든 똑같다. (1) 출근해야 하는 시간이 있고, (2) 해야 하는 업무가 있으며, (3) 상사의 기준에 맞는 아웃풋을 내야 한다. 이 세 기준이 회사 생활의 본질이다. 그러니 지금 회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면,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만이 적합한 옵션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지금 당신. 회사가 적성에 안 맞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고 싶은 맘이 없는지도 모른다.
주간 에세이 {이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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