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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Jan 15. 2024

손톱 물어뜯는 사람의 항변

“할머니랑 점심 먹고 피부과에 가보자."

벌써 15년 차이다.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한 지 말이다. 손톱 물어 뜯기는 일종의 항불안제 복용과 비슷하다. 불안한 상황에 닥쳤을 때, 손톱 혹은 손톱 옆 살을 벗기며 마음의 안정을 취한다. 오히려 처방 약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손가락만큼 언제나 내 옆에 있고, 늘 부족하지 않은 약은 없을 것이다.


십여 년째 계속되는 습관의 시작은 진주할머니 댁에서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방학 때 외할머니댁인 종종 경상남도 진주 이현동으로 보내졌다. 할머니와 나의 사이가 좋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연년생 자매 양육의 육체적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는 부모님의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나는 방학 동안 허용적이고 헌신적이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심리적으로 안정된(?)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11살의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그 당시 ‘말괄량이 삐삐’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삐삐와 어울려 노는 남매 중 오빠인 토미에 대해 묘사한 구절을 읽게 되었다.


‘토미 어찌나 모범생이던지 손톱 물어뜯기 같은 건 해본 적도 없는 소년이었다.’


조용하고 심심한 할머니 댁 거실에서 하릴없이 그저 서있었는데 갑자기 호기심이 나를 덮쳤다.


‘아니, 손톱을 물어뜯는 게 뭐지? 어떻게 하는 거지? 손톱을 어떻게 물어뜯는 거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손가락을 들어 입에 넣었다. 그땐 몰랐다. 이렇게 오래 손톱을 물어뜯는 인간이 될 줄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무리 편안한 할머니댁이었다 해도 심리적 불안감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무리 할머니가 좋다 해도, 엄마 아빠와 떨어져 있는 게 무섭고 불안했겠지. 태생적으로 불안이 많은 내게 손톱은 순식간에 동반자가 되어버렸다. 하도 뜯다 보니 아픔에도 무뎌져, 스스로 뜯고 있다는 인지조차 못할 정도의 습관이 되었다.


손톱 물어뜯기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장점은 마음의 안정이요, 단점은 구린 심미성이다. 마음이 따뜻한(혹은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은 더러 내 손가락을 보고 다쳤냐고 묻기도 한다. 피 맺힌 손가락으로 사회생활을 할 때 만나는 이런 예기치 않은 걱정이나, 상대가 (티는 안 내겠지만 속으로) 느낄 혐오감이 유일한 단점이다. 그럴 땐 이상한 자존심을 부리며 다친 건 아니고 피부가 건조해서 벗겨진 거라며 거짓말을 친다.

그러니까, 나에게 손톱을 뜯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장점이 더 큰 습관이라고 여겼다.




평생 고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부터 손가락 관리에 조금씩 신경 쓰고 있다. 젤네일을 바르고 핸드크림을 챙겨 바른다. 손톱을 씹고 싶으면 껌을 씹기 시작했다. 원인 제공자는 진주할머니다.


작년 연말휴가 때 진주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돌아왔다. (연말 휴가는 외국계 회사의 유일한 좋은 점이라 할 수 있다) 근래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을 하면서 문득 할머니 할아버지와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연말 휴가 내내 할머니댁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외갓집에는 총 6명의 손주가 있는데 그중 나는 첫째 손주다. 할머니는 내게 '첫째 손주라서 첫사랑처럼 특별하다'라고 말씀해주시곤 한다. 만약 내가 할머니였다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서울에서 대학 잘 다니다가 덜컥 낳아버린 손주를 좋아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여하튼 할머니는 나를 특별히 여겨주신다.


바지 통이 왜 그렇게 넓은 걸 입느냐, 머리는 너무 긴 거 아니냐, 핸드폰 액정 깨진 걸 왜 들고 다니냐’ 


시끌벅적한 명절과는 다르게 할머니 댁에 나만 덜렁 있으니, 할머니의 관심이 오롯이 나에게 꽂혔다. 들어도 타격은 크지 않은 애정 서린 잔소리 공격이 이어졌다. 엄마의 잔소리와 다르게 할머니의 잔소리는 기분 나쁘지 않다. 그냥 능청맞게 넘길 수 있다.


그러던 할머니 눈에 내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연말 업무 스트레스로 잔뜩 뜯어서 벌겋게 손 끝이 변한 상태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내 손가락을 보고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할머니랑 점심 먹고 피부과에 가보자."


누가 봐도 뜯은 자국이 역력한데. 할머니는 손주가 스스로 손가락을 이렇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애써 외면하시는 것 같기도 했다. 20년 넘게 봐온 손주가 손톱 물어뜯는 것을 알고 계실 법도 한데, 애써 모르는 척 피부병이라고 생각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피부과는 안 가도 된다고 한참을 설득하니 이번에 할머니왈.
    

"할머니 서랍에 있는 밍크오일 발라서 촉촉하게 해 줘라"


역시 할머니들에게는 밍크코트와 오일이 최고인가 보다. 할머니의 자개 화장대 서랍을 열면 밍크오일이 나온다. 할머니 맘을 알면서도, 비윤리적으로 채취했을 밍크오일에 역함을 느껴 바르는 시늉만 했다.


"오 할머니 바르니까 확실히 촉촉하다!"


할머니의 맘을 달래기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한다.


”밍크오일발랐어, 통넓은바지 안입을게, 살뺄게“


오직 할머니만을 위해서라도 손톱 뜯기를 멈춰야겠다고 결심했다.





주간 에세이 {이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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