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승무원, 둘째 자의식 버리기, 셋째 아기 승객 생각하기
최첨단 기술의 집합체라고들 말한다. 비행기 말이다.
전쟁으로 인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기술 중 하나인 항공 기술. 삶의 터전으로부터 떨어진 미지의 땅을 단돈 몇십만 원이면 밟게 해 준다. 왕복 50만 원짜리 태국 여행 한 번이면, 번아웃을 털어 버리고 리프레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 비행기에게 고마워할 줄 모르고 항상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일지도 모른다. 제목을 보고 손가락이 반응했다면 아마 비행기 공포증을 보유하고 있으리라.
사람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고소공포증’과 ‘세상에 대한 불신’, 이 두 가지 때문에 비행을 무서워한다.
‘고소공포증’은 뻔하니 넘어가겠다. 쉽게 말하자면 잠실롯데타워 아래 서기만 해도 literally 다리가 벌벌거리는 사람이다. 높은 곳에 있는 건 자연 이치에 어긋나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태양 가까이 날다가 추락한 이카루스의 후예이기라도 한 걸까. 아예 태어날 때부터 내 몸 안 세포 하나하나가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 높은 곳은 자연스레 죽음과 연상되어 버린다.
어쩌면 비행기 공포증의 근본적 이유는 ‘세상에 대한 불신’ 일지도 모른다. 내 손이 닿지 않은 모든 것을 불신한다. 기술의 허점과 사람의 실수를 믿는다. 식당에 가면, 식당 주인을 못 믿는다. ‘원산지 표기가 진실일까? 이 가격은 적절한 걸까? 이 테이블 닦은 걸까? 반찬 재탕하나? 공장에서 떼 온 것 같은데?’
똑같은 논리가 이 세상 거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맞다. 피곤하게 사는 편 맞다.
공포증 있는 사람치고 비행기를 타본 경험은 몇 번 있다. 대학 프로그램 참가 차 갔던 미국 텍사스와 LA, 겨울방학을 맞아 초저가 티켓을 구해 난생처음 친구와 떠났던 대만 타이베이, 근로장학금으로 번 돈을 탈탈 털어 가족들과 떠났던 베트남 다낭, 배낭여행 로망을 이루고자 동생과 떠났던 미얀마 캄보디아 태국...
그럼에도 여전히 비행기는 무섭다. 차라리 뱃멀미를 견디고 배를 타겠다.
하지만 비행기는 늘 시간 대비 가장 효율적인 교통수단이었고, 젊은 날을 최대로 즐기길 바라는 나의 강박이 결국 비행기로 이끌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모르는 사람과 다닥다닥 앉아야 하는 이코노미석의 수선스러움. 이륙할 때면 마치 나비 백 마리가 뱃속에 있는 듯 간질거리는 느낌. 기압 때문에 퉁퉁 붓는 다리와 찢어질 듯 건조해지는 콧구멍까지.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이 불편함과 공포 그 자체다.
그때마다 공포를 없애기 위해 다양한 머릿속 에어백을 설치했는데, 특별히 여러분들에게만 살짝 공유할까 한다.
이륙 전 구명조끼 사용법을 알려주는 승무원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저분들에게 비행기는 사무실이나 다름없다. 내가 하루에 8시간씩 지루함을 느끼는 재미없는 사무실 말이다. 빨리 집에 가고 싶고 지겨운 맘은 모든 직장인 동일할 것이다.
그리고 벌써부터 검게 타들어 가고 있는 마음에 상상 한 방울을 끼얹는다. 내가 지금 저 승무원이었다면 어떨까. '뱃속이 간질거리는 느낌도, 터뷸런스로 기체가 흔들릴 때도, 얼른 집 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 흔들림도 저들에겐 아무것도 아닐 거야.'
실수 없이 기내 서비스를 준비하기 위해 잔뜩 집중하고, 또 동료와 스몰톡을 나누고, 간식을 먹는. 그런 일상적인 승무원을 상상한다. 그러면 뱃속 나비 백 마리 중 스무 마리 정도는 없앨 수 있다.
매일 841만 명이 비행기를 탄다고 한다. 1년이면 31억 명이다. BBC에 따르면, 언제든 100만 명 정도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출근 버스에서 생각 없이 올려다보던 하늘이 사실 각자의 경로를 달리고 있는 수만 대의 비행기로 빼곡했다는 것이다.
*한경-年 31억 명, 세계의 하늘을 누빈다
자, 그러면 내가 탄 비행기의 특별함이 사라진다. 그러니까 만약 사고가 난다 하더라도, 수천수만 대 비행기 중 내가 탄 비행기가 사고 날 거라는 생각은 '지나친 자기중심적 사고'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늘에 그렇게 많은 비행기가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면, Flight trader(클릭)라는 웹 사이트에 들어가 보시길. 전 세계에서 순항 중인 셀 수 없이 많은 비행기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
나 또한 비행기 탑승 전, (혹은 가족이 비행기 타기 전에도) 항상 이 사이트에 접속해 위의 사실을 되새긴다.
‘나는 특별한 비행기에 타는 게 아니다. 대충 세봐도 천 개가 넘는 비행기 중에서 하나를 타는 것뿐이다.’
나는 근처 좌석에 아이가 타는 걸 크게 개의치 않는 성격이다. 물론 울음소리에 비행기에서 깰 때도 있었지만, 나도 한때 어렸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각설하고, 비행기에 탑승한 아이를 떠올려 보자. 실제로 당신 주변에 아이 승객이 없다 해도, 거대한 기체 안에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없어도 상관없다. 상상이니까.)
이제 그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저 아이보다 내 처지가 낫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자기 몸도 아직 못 가누는 아기도, 말을 할 줄 아는 아이더라도. 자신이 지금 어디에 가는 건지, 지금 타고 있는 요상한 물체는 무엇인지, 심지어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의문투성이일 것이다.
반면 나는 어디로 가는지, 심지어는 왜 가는지까지도 아주 제대로 알고 있다. 영문도 모르고 비행기를 탄 아이와 비교했을 때 나는 지금 타고 있는 물체에 대한 정보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즉, 비교해 보자면 비행에 대한 무서움은 아이들이 더 클 것이며, 나는 내가 결정한 이 비행을 어른스럽게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우주비행선이나 잠수함 탑승보다 비행기가 낫다'는 걸 떠올리거나, '비행기 사고보다 교통사고 확률이 높다'는 걸 상기시키는 방법도 있다. 아무래도 비행기 공포 증후군 동지들에게 더 많은 팁을 공유할 수 있도록 비행기를 탈 일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
이렇게까지 뇌를 작동시키면서 비행기를 타려 하는 이유는, 이 모든 무서움을 상쇄할 정도로 여행에서 얻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하게 낯선 곳을 향하는 비행기는 무섭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무섭지 않다. 여행자로 지냈던 시간 동안 좀 더 용감한 인간이 되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집에 돌아와 그 용감함이 흐려지면, 다시 겁쟁이의 심장으로 여행을 떠나면 된다.
주간 에세이 {이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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