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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노 두 잔

by 이솔

오랜만에 약속 있는 토요일이다. 벌써 십년지기가 된 조햄 언니를 만났다. 일 년에 한 번만 봐도 ‘친한 관계’로 정의되는 어른들의 세상을 살면서, 조햄과는 일 년에 두 번이나 본다. 매우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다.

대학 동기였던 조햄은 나보다 2살이 많은데, 햄스터를 닮은 무쌍 눈에 단단한 성격을 가진 언니를 나는 언젠가부터 조폭햄스터의 줄임말인 조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햄이라는 단어가 형이라는 단어도 내포하고 있으니 언니라는 낯간지러운 표현을 대신하기에도 제격이다.


접선 장소는 압구정 로데오. 압구정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위화감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동네다. 이번엔 우리 둘 사이 중간 위치라서 약속 장소로 선정되었지만, 나는 압구정으로 향하는 내내 약간 주눅이 들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압구정인가’하는 마음으로 압구정 로데오역에서 내렸다. 자주 탈 일이 없는 수인분당선은 무척 쾌적했다. 서울에 살지 못한다면 수인 분당선이 지나는 동네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일주일에 걸친 카톡 대화를 통해 결정한 오늘의 메뉴는 ‘뱃고동’이라는 불고기집이었다. 낙지 불고기를 파는데, 여기서 불고기는 불고기 버거의 불고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낙지를 불로 구웠다는 의미를 가진다.


압구정치고 가격이 괜찮은 집이었다. 주말에도 오후 5시까지 백반 메뉴가 주문되는데 1인분에 9,500원이다. 약속 시간이 5시였는데 나는 4시 49분에 미리 도착해서 백반 2개와 오징어튀김을 주문했다. 5시가 얼마 남지 않았던 터라 백반 메뉴 주문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무척 걱정했다. 일품 메뉴로 시키려면 1인분에 16,500원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문제없이 주문을 완료했다. 역시 인간의 걱정 중 팔 할은 쓸데없는 걱정이다.


회전이 빠른 대박집답게 메뉴가 빨리 나와버렸고, 나는 조햄을 기다리며 집게로 낙지 불고기가 타지 않게 뒤적였다. 낙지의 양이 무척 적었으나 (건더기를 한주먹에 집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양념에 볶음밥을 해 먹으니 배가 적당히 찼다.


2차로 술이나 한잔할까 했으나 더운 날씨에 취하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조햄이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다고 자부하는 당근 케이크를 먹으러 갔다. 그런데 글쎄 아메리카노가 무려 7,200원이었다. 내 소비 철칙 중 하나가 ‘아메리카노가 4,500원 이상인 카페 가지 않기’인데 강남에서는 어겨질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물가 상승률을 반영하여 철칙을 ‘5,500원’ 정도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아까 백반으로 아낀 돈을 카페에서 다 탕진하게 생겼다. 다른 음료는 8천 원대였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당근케이크는 한 조각에 9,900원이었다.

당근 케이크는 당근 향이 연하고, 크림치즈보다 생크림 함량이 높은 부드러운 맛이었다. 맛에 비해 비쌌지만 디귿자로 된 편한 소파 자리에 앉아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언니의 회사 에피소드를 듣다가 그만 내가 당근 케이크를 다 먹어버려 하나 더 시켰다.


3차로는 요거트 아이스크림집에 가서 아이스크림 두 덩이에 망고와 바나나, 연유를 추가해 12,000원어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당근 케이크로 끈적해진 입을 상큼한 요거트 아이스크림으로 덮으니 살 것 같았다.

집에 가는 길, 왠지 압구정에서 만난 것 치고 경제적으로 논 것 같아 홀가분함을 느꼈다.




일요일에는 회사 동기의 결혼식이 있었다. 주말 내내 약속 있는 날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이번 주는 크게 무리했다.


논현동의 아름다운 예식장이었다. 실내였는데 창이 높고 크게 나 있어 야외 수준의 햇살이 비쳤다. 시원하다는 실내의 장점과 자연광이라는 야외의 장점을 합친 식장이었다. 아름다운 신부를 보면서 여기서 결혼하는 나 자신을 그려봤는데 도무지 상상되질 않았다. 못할 것 같아서인지, 아니면 안 하고 싶어서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식이 끝나고 뷔페를 먹었다. 밥이 맛있기로 유명한 식장이라더니 그동안 다녔던 결혼식 뷔페와 차원이 달랐다. 뷔페에서 회가 맛있기 힘든데 퀄리티가 참 좋았다. 의외로 가장 맛있었던 것은 수박이었다. 흰 부분 없이 새빨간 속살만 네모반듯하게 잘라낸 수박을 한입 가득 넣고 씹었다. 이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뷔페에서 후식까지 먹었건만, 간만에 만난 친구 M과 함께 카페로 향했다. M이 카카오맵으로 일 분 만에 쓱쓱 찾아 보여준 카페는 객관적으로 아주 멋졌다. 강남에서 보기 힘든 나무 뷰 대형 카페였다. M처럼 금방 멋진 공간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8분 정도 걸었는데 다행히 습하지 않아서 땀이 나지는 않았다. 카페에 도착해서 메뉴를 쫙 스캔하다가 결국 오늘도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핫은 6,000원인데 아이스는 6,500원이었다. 어제 7,200원짜리 커피를 마셔서 그런가 저렴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창가 근처 나무 의자에 마주 앉자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대충 ‘결혼은 할 건지, 아이는 낳고 싶은지, 함께 살 남자의 생활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회사 생활은 왜 이리 쉽지 않은 건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신혼집은 전세와 매매 중 무엇이 나을지, 고양이가 얼마나 삶에 활력을 주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때로는 머리를 쥐어 잡으며, 때로는 얼음을 와작와작 씹으며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


결론은 없는 이야기였다. 그저 끝도 없이 풀어지는 두루마리 휴지 같은 대화만 줄줄이 나누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으로만 하던 고민을 풀어놓았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럼 적어도 머릿속 엉킨 휴지가 몇 칸인지는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 서울대 입구역에 내려 한 조각에 1,500원 하는 피자를 두 조각 샀다. 배가 고픈 건 아닌데 그냥 사야 할 것 같았다. 심리적 허기가 몰려왔다.


주말 내내 분수에 맞지 않는 커피를 마시고 다녔더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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