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를 정리할 용기
{EP15}
서울살이에서 배운 것
3. 인간관계를 정리할 용기
나의 카톡 친구창에는 딱 다섯 명밖에 없다. 엄마, 동생, 할머니, 할아버지, 카를로, 끝. 가족 네 명과 연인 한 명이 끝이다. 인간관계가 그렇게 협소하냐고 묻는다면 아마 나의 대답은 YES겠지만, 카톡친구가 협소한 까닭에는 나름의 연유가 있다.
"인간관계"
인간이 살아가면서 수도 없이 마주치는 '인간'과 '관계'를 붙여놓았을 뿐인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행위가 완성되었다. 이는 또 다른 전문용어로 인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누군가는 비즈니스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까지 인맥이라고 여길 것이고, 또 누군가는 같이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친구들까지가 인맥이라고 여길 것이다. 필자는 그에 비하면 다소 보수적으로 인맥의 바운더리를 정해두었다.
"심심할 때 연락할 수 있느냐 없느냐"
심플해 보이지만, 이 기준으로 연락처를 정리하다 보면 미니멀리스트 못지않은 콤팩트한 전화번호부가 남는다. (비록 옷장은 터질 듯한 맥시멀리스트이지만..) 대체 어떤 맘의 상처를 입었길래 그렇게 극단적으로 정리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장례식이나 결혼식 같은 인생의 굴곡점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현실자각타임을 겪는다는데, 나는 운 좋게도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인간관계를 정리하라는 강력한 계시(?)를 받았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카톡 친구들의 바뀐 프로필 사진(프사)을 구경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카톡 친구가 프사를 바꾸면, 이름 옆에 빨간 동그라미가 뜬다. 바뀐 프사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바뀐 프사를 구경했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을 정도로 친하지 않은 동기의 프사까지 구경했다.
'H는 유럽에 놀러 갔네'
'Y는 대외활동 하면서 친구들 많이 사귀었나 보다'
'D는 공모전에서 상 탔구나. 상금이 백만 원이라니'
'S프사는 실물보다 훨씬 예쁘게 나왔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남에게 관심 많은 사람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카톡 염탐의 의도가 매우 불순했다는 것이다. 나는 카톡 친구 프사를 보며 '방구석에 누워서 프사를 염탐하는 나'와, '좋은 곳에 놀러 갔거나, 성공을 자랑하는 친구' 사이의 괴리를 느끼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까, 단둘이 만나서 대화를 나눌 일도 없을 만큼 사이가 먼 친구를 보면서 비교하며 동기부여의 땔감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동안 '비교는 나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비교가 내 열정의 장작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다. 중학교 때는 나를 괴롭힌 친구보다 점수를 잘 받겠다고 공부했고, 고등학교 때는 나보다 풍족한 환경에서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있을 고3들을 생각하며 공부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니 비교의 풀이 달라졌다. 전국 각지에서 온 친구들이 넘실댔고, 비교의 잣대는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사는 지역의 차이, 입시 방법의 차이, 집안 형편의 차이, 용돈의 차이, 해외 경험의 차이… 처음엔 무턱대고 학창 시절에 하던 것처럼 비교를 시작했다. '나는 쟤보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 더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 받아야지, 쟤는 미국 살다 왔다는데 더 열심히 토익 공부 해야지...' 이렇게 비교를 하다 보니 결국 전국 대학생들 전체가 비교 대상이 되었다. 전국에 대학생이 얼마나 많을 텐데... 한 학기에 그냥 전공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학기와 함께 대외활동 6-7개 병행했다. 당시 유행이었던 블로그도 운영했다. 아르바이트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이 내 비교의 표에서 Y축을 넓혀져 버리면,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던 목표가 다시 멀어지는 것이었다.
계시(?)를 받은 그날도 평소와 똑같이 집으로 가는 4호선 당고개행 열차를 타고 있었다. 금요일 밤이라 술 취한 사람들로 만석인 지하철은 앉을 곳도 없었다. 조별 과제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던 나는 문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리고 도파민 창구인 카톡 프사를 뒤적거렸다. 순간 미칠 듯한 심심함이 나를 덮쳤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금요일을 진탕 즐긴 것 같은데, 나는 하릴없이 집에 돌아가는 꼴이라니. 당장 누군가를 불러서 치킨이라도 먹자고 꼬시고 싶었다. 총 236명의 친구 리스트에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몇 명, 대학 동기, 중고나라 거래했던 사람, 예전 직장 상사, 심지어는 미용실 번호까지. 나와 얽힌 모오든 관계가 우선순위 없이 가나다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분명 이백 명 넘는 사람이 있는데, 그중 놀자고 당장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 강렬히 깨달았다. '내 인생에 1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인생을 낭비했구나' 매일 같이 염탐하고 비교했던 대상의 인생에서 막상 나는 엑스트라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다 지워버렸다. 나에게 진짜 변하지 않을 인연만 남기고 깨끗하게. 카톡도, 전화번호부도, 전부 삭제했다. 지금 당장 메시지를 보낼 마음이 없는 관계들은 몽땅 삭제해 버렸다. 어차피 진짜 연락할 사람은 어떻게든 연락할테니까. 인스타그램에도 똑같은 법칙을 적용했다. 게시글을 볼 때 왠지 모르게 부럽고, 나와 비교하게 되는 멋진 친구가 있으면, 가차 없이 숨김 처리했다. (얼마 전에도 한 명 추가했다)
나 자신을 갉아먹던 비교를 멈추기 위해 인위적으로 물리적인 환경을 마련한 것이다. 그 결과 중요하지 않은 관계에 신경을 덜 쓰게 되었으며, 간혹 연락하는 사이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겉치레 관계 대신에 진짜 관계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론 정신적 피로에 때로는 물리적 방어가 효과적일 때가 있다.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고민 말고 숨김 처리를 해보자. 진짜 중요한 것에 온전히 집중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