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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Oct 16. 2023

무의식이 대답해 준 지갑 잃어버린 이유

적어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이유는 알면서 살고 싶다

{EP16}


서울살이에서 배운 것 
4. 무의식에 귀 기울이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재 절을 지낼 때의 일이다. 어머니의 인연으로 전남 정읍에 있는 작은 절에서 49재를 지내게 되었다. 엄마는 대학원에서 심리상담학을 전공하셨는데, 대학원 동기가 스님(!)이셨던 덕에, 스님께 삶과 죽음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여쭤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식도암이셨다. 평소 술과 담배를 가까이하면서도 건강을 맹신하고 건강검진을 소홀히 한 결과였다. 위 내시경 한 번이면 쉽게 발견되었을 암인데, 고집과 아집 때문에 병을 키운 것이다. 자식으로서 억지로라도 건강검진에 데려갔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딸놈은 회사에 다니며 매년 무료로 수면 위내시경을 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식도암이라니. 나의 무신경함이 죽음에 한몫한 것 같아서 한동안 많이 속상했다.


속상함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음도 컸다. 동생과 나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아빠는 먹는 걸 참 좋아하셨다는 점이다. 아빠는 돈을 못 벌어 올 때도, 그러니까 일반 사람이라면 우울하거나 힘들어했을 상황에도 밥을 참 잘 드셨다. 어린 마음이 보기에도 참 뻔뻔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런데 그렇게 밥을 잘 먹고 또 좋아하는 사람이, 식사할 때마다 사용하는 식도에 암이 걸리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간암, 폐암, 대장암... 술담배를 하고 올빼미형 사이클을 가진 중년남자가 걸릴만한 암 종류도 세고 셌는데 대체, 왜, 하필, 식도암인지 모르겠다고.


동생과 나의 볼멘소리를 듣자 말을 듣자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쩌면 '밥을 먹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죽고 싶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고.' 딸들이 겉으로 볼 땐, 가장의 역할도 제대로 못 하면서 밥을 잘 먹는다고 생각했겠지만, 막상 당사자는 밥을 먹으면서 속으로는 죽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겉으로 보기엔 모르는 거라고.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아직 암 발병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꽤나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스트레스가 암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 세상에, 어쩌면 그런 무의식이 암을 만든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죽고 싶다는 정신의 말을, 육체가 듣고서는 암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칼 융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해도, 나의 무의식은 나의 판단과 생각에 영향을 끼친다'라고 말했다. 즉,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진짜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면서 무의식의 목소리는 대부분 무시된다. 



이날부터였다. 일상에 바보 같은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이 시킨 일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스님도 당신이 하신 말씀이 이렇게 야매로 자체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을지는 모르실 테지만) 예를 들어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종일 스스로를 탓하기 바빴다. '어떻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갑을 잃어 먹냐~ 진짜 바보 아닐까~ 태국에서 사 온 거라 다시 살 수도 없는 지갑인데, 뭐 하냐 이솔~' 그런데 이제는 나의 무의식을 살펴본다.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무의식적으로 지갑을 맘에 안 들어 했는지도 몰라'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이 작용해서 나도 몰래 주머니에서 지갑이 떨어지도록 그냥 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진짜 이유는 나의 칠칠치 못함 때문일지라도, 어쩌면 무의식이 잃어버린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보는 것이다. 다른 상황에서도 이런 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출근길 버스를 간발의 차로 놓쳤을 땐
> 어쩌면 회사에 가기 싫었던 무의식이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을지 몰라 

아스팔트에 핸드폰을 떨어트렸을 땐 
> 어쩌면 얼른 폰을 바꾸고 싶은 무의식이 있었을지 몰라 

라면을 끓여서 식탁으로 가다가 엎었을 땐
> 어쩌면 건강한 음식을 먹고 싶었는지도 몰라

누군가 자기 얘기만 하는 게 짜증 나고 미울 땐
> 어쩌면 저 사람처럼 나도 내 얘기만 잔뜩 하고 싶은지 몰라


이런 식이다. 인생에 원인을 알 수 없이 일어나는 일들을 자책하는 대신에,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라는 숨통을 살짝 틔어놓았다. 자책해 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데, 허공에 하소연을 하기보다는 무의식을 살피는 게 건설적이다. 물론 자체 파악한 무의식이 정확도가 높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이유를 알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 너무나도 많으니, 적어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이유는 알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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