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주리 미술관. 파울라 레고
파울라 레고, 1935년, 포르투갈 출생, 런던에서 작업 중.
성별이 여자인 화자를 '성담론'으로 읽는 전시는 늘 흥미가 떨어진다. 수동적인 여성과 지배당하는 여성의 해방으로 그녀들의 작품을 읽어내는 것은 늘 98% 부족하다. 어떤 작품이든 작가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의 정체성을 벗어나긴 어렵기에 그런 담론이 가진 설득력을 무시하지는 못하겠지만, 조금 더 창의적이고 새로운 기획과 이야기를 기다리는 입장에선 이번 전시같은 종류의 스토리텔링은 반갑다.
오랑주리의 이번 전시는 미술사에서 중요하지만 대중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화가인 파울라 레고를 익숙한 이미지(클래식한 미술사의 작가들)와 함께 배치함으로써 가독성 있는 기획을 보여준다.
어린시절 들었던 동화의 이야기와 인형에서 발전한 이미지/ 마이클 켈리가 떠오른다.
전시의 대표이미지로 사용한 이 작품에서 가장 왼쪽에 혼자 관객을 바라보며 춤을 추는 여인은 작가 자신이다.
론뮤엑과 파울라 레고, 어린 시절의 훈육과 폭력. 그안에 고스란히 노출된 육체
시녀들, 장주네와 파울라 레고
루이즈 부르주아와 파울라 레고,
드가와 파울라 레고, 발레리나.
드가의 발레리나가 아름다운 예술가가 아니듯이, 그녀의 발레리나들도 역시 근육과 움직임을 가진 육체.
짐승, 소녀, 그로테스크, 우아함, 퇴행, 아름다움,유아,성숙
이 모든 것을 한 캔버스안에서 이미지로 마주하고보니, 조금 섬찟하다. 한발짝 뒤로 물러나본다. 아름다운 것이라면 자고로 심리적인 안전거리를 유지해야하는데, 그녀는 그 거리를 무시한다. 우아함은 과격하고 추하다.
신디셔먼과 마이크 켈리의 작업에서 보이는 절단된 신체도 보이고, 베이컨이 좋아했던 짐승들, 살, 피도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드가의 발레리나도 보이고, 론 뮤엑의 극사실주의적 인체도 보인다. 쓰고 보니 파울라 레고를 관통하는 것은 육체였구나 깨닫는다.
그녀가 전시하는 육체는 관음증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몸이 아니다. 전통적인 페미니스트들이 관음증적 시선을 비판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들의 몸을 이용하는 방식을 비켜나간다. 지배당하는 여성의 육체를 그리되, 강하고 건장하며 오히려 지배하는 듯해 보인다. 오랑주리의 이번 전시는 파울라 레고를 미술사의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경유하는, 그러나 동일한 스타일을 유지하는 화가로 보여준다. 여성주의 담론이 아니라 아름답지만 구역질나는 그로테스크의 실험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