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일어난 테러를 바라보며
2015년 11월 13일의 기록
이레야,
너는 마법의 유모차에서 내내 자느라고 눈치 못챘겠지만, 우리가족은 오늘 가장 추한 일이 벌어졌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지는 장소에 다녀왔단다.
13일의 금요일이었던 엊그제 파리에는 끔찍한 테러가 벌어졌어.아빠엄마가 파리에 있는동안 일어난 두번째 테러야. 첫번째는 지난 1월이었는데,샤를리 엡도라는 풍자만화를 발행하는 신문사에 IS가 들이닥쳐 이슬람을 비하했다는 이유로 편집자들과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죽였지.
그리고 금요일밤을 즐기고있는 젊은 시민들이 무자비하고 끔찍하게 죽음을 당했단다. 오늘까지 129명이 죽었고, 300명의 부상자가 생겼어. 그 부상자들 중에 100명정도는 매우 위중한 상태야. 게다가 시신 중 20-30명은 신원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어. 친구와 가족을 찾지못한 사람들이 사진을 들고 파리 시내의 병원들을 돌아다니며 지인을 찾는 모습도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방송되고 있단다. 테러가 일어났던 장소는 모두 7군데 였는데, 그중에는 엄마와 아빠가 자주 가던 쁘띠 깜보쥬라는 식당도 포함되어 있어서 뉴스를 보고 엄만 정말 깜짝 놀랐단다. 테러리스트들은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게임하듯 조준해서 죽였다고 하더라. 그 식당과 바로 옆 카페에서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순간 목숨을 잃었어.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보니, 사람들은 처음에 총을 쏘는 소리를 듣고 불꽃놀이가 열린 줄 알았다고 하니, 그 상황이 얼마나 비일상적이었고, 사람들이 얼마나 무방비 상태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실감이 나서 너무 슬펐어. 그 테러리스트들은 파리 외각에 있는 축구장 근처의 바에서 폭탄을 터뜨리고, 마지막으로는 1500석 규모의 바타클랑이라는 콘서트장에 당도했어. 그리고는 콘서트장에 모인 관객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댔단다. 인질극을 벌이던 테러리스트 들은 경찰이 들어오자 허리에 차고있던 폭탄벨트를 터뜨려 자살했단다.
한국 텔레비전에서도 크게 보도된 테러 소식을 들은 엄마 친구들에게 새벽부터 많은 연락이왔고 하나같이 다들 당분간 절대 외출하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고 당부했어. 사실, 별로 겁이 없는 엄마도 이번소식엔 정말 많이 놀랐고 무서워서 아무데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 우리가 지나다니고 즐겼던 그 일상적인 장소들에서 일어났을 그 사건이 너무 잘 상상되어서 였지.그런데 평소엔 안전 민감증인 너의 아빠가 오늘 리퍼블릭 광장에 가보자고 하더라. 아빠 말처럼 리퍼블릭 광장은 많은 수의 경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검문도 강하게 하고 있어 파리의 어디보다 안전해보였단다. 리퍼블릭 광장은 프랑스 사람들이 시위나 집회를 할때면 늘 모이는 큰 광장이란다. 올해 1월에 샤를리 엡도라는 신문사에 테러가 일어났을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던 곳이기도 해. 서울로 치면 광화문 광장 같은 곳이야.
사실 엄만 그곳에 가는게 한번에 내키지는 않았어. 유모차를 끌고 그곳까지 가는 것이 왠지 겁이났지. 나와 아빠만 있다면 얼른 어디론가 몸을 숨긴다거나 도망가는것이 가능할텐데, 네가 함께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의 위험요소들까지 다 상상하게 되더라. 게다가 외국인으로서 이런일의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런일에 참여하는 게 어색했어. 프랑스인들과 함께 국가인 막세이에즈를 함께 부른다거나 프랑스 국기를 흔들며 우리는 리퍼블리캔이라고 외칠수도 없는 신분이지. '외부자의 시선'으로만 보게되는 한계 때문인지, 내가 외부인이라는 자격지심에서 인지, 이들의 깊은 슬픔에 그냥 공감하는 척만 하는것 같아 뭔가 껄끄러웠단다.
하지만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듣고 엄만 조금 용기를 내었지. 이곳에서 테러가 난 다음날인 14일 토요일에 광화문에서는 대규모의 집회가 열렸어.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대규모의 집회였지. 그런데, 단지 시민들이 모였을 뿐인데, 정부에서는 경찰차들을 이용해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버리고,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무차별적으로 쏘았단다. 그곳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있고,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도 계셨겠지. 시민들이 모여 폭력적인 행동을 하거나 특별한 움직임을 보인것도 아닌데, 그곳에 같은 의견을 갖고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물대포를 맞아야했단다. 심지어 물대포를 맞고 병원에 실려가거나 목숨이 위중하게 된 사람들까지 나왔어.
엄마가 서울에 살 때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어. 결혼하기 전에 엄마 아빠는 그 집회에 참석해서 밤새 촛불을 들고 행진을 했단다. 아침이 되어 명박산성 앞에서 황망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그 때를 떠올려보니, 거의 7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은 전혀 나아진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아마도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어제도 그곳에 나가 목소리를 보태고 있었을 친구들을 생각하니 엄마는 비록 몸은 테러가 일어난 파리에 있지만, 서울에 살았어도 안전하진 않았겠단 마음이 들었어. 서울에 살았다면 아마 그곳에 있었을테니.그리고 서울이든 파리든 그냥 자기가 있는 곳에서 같은 마음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연대하는게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게 우리가족은 쫄래쫄래 리퍼블릭광장에 당도했어.
역시나, 리퍼블릭광장은 발디딜틈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어. 공공장소로 외출을 자제해 달라던 정부의 경고가 무색했지. 어른들 뿐 아니라 아이들, 그리고 너만한 아가들도 유모차에 실려 광장의 중앙에 동상을 가득 애워싸고 있었단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슬픔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니, 집에서 너를 안고 강박적으로 뉴스를 찾아보며 우리의 안전을 걱정하던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럽더라. 아빠와 나는 유모차를 차례로 지키면서 사람들이 추모의 초와 꽃들을 놓은 동상 앞을 거닐었지. 죽은 친구들의 사진을 걸어놓은 이들도 있었고, 아이들이 그려놓은 그림도 있었고, 저마다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하는 글귀들이 빼곡하게 붙여있었단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노라니 슬픔이 밀려왔어. 광장에는 자원해서 프리허그를 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룹지어 모여서 국가를 부르거나 유명한 프랑스 가요를 함께 부르며 오히려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이들도 보였어. 사람은 정말 많이 모였지만, 아주 조용하고 차분해보였단다. 그리고 다들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 껴안고 울기도 했어. 분노와 미움보다 위로와 연대가 더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아 보였어. 엄만 오늘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지. 마음속에 있던 무서움이 조금은 사라지는 듯 했어.
그리고 아빠와 함께 생마탕운하를 건너 쁘띠 깜보쥬 식당으로 갔단다.그곳으로 가서 기도를 하기 위해서 였지. 마주보고 있던 두 가게 앞 길엔 역시나 사람들로 꽉차서 한번에 접근할 수 없었단다. 인파를 헤치고 두 곳을 차례로 둘러본 후 돌아왔어.
돌아오는 길에 버스안에서 본 해가 저무는 파리의 풍경은 그렇게 아름다울수 없었어. 노트르담 성당과 센 강을 배경으로 한 붉은 노을이 금빛 가로등과 어울려 파리의 아름다움을 뽐냈어. 맞아. 파리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지.라고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광경이었어. 그리고 엊그제 있었던, 아마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추하고 더러운 일이었을 그 사건을 떠올려보았단다. 이곳은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추한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 같아.
아마도 네가 살아갈 세상은 엄마 아빠가 사는 세상보다 기술적으로 더 편리해지고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가득해지겠지. 하지만, 그 세상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빛은 늘 어둠과 함께 한다. 반대로 말하면 어둠 속에서 빛은 더 밝게 보이지. 네가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길 즈음에 혹시나 이런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면, 텔레비전 뉴스나 SNS로가 아니라, 꼭 필요한 곳에서 함께 울고 함께 머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마 이런 이유라면 우리가족의 오늘 외출이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어제 우리 가정예배때 보았던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옳고 그름보다 사랑이 우리 가족의 행동 기준이 되었음 좋겠다.
세상살이 40일차 이레에게 엄마노릇 40일차 연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