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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눈 Dec 18. 2022

저는 배움에 느린 학생입니다.

학교 가기 싫은 학생의 마음

여름 방학 때 디지털 드로잉 연수를 이틀간 받게 되었다. 앱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다양한 기법들을 단계적으로 배우게 되는 연수였다. 가까운 미술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연수이기도 하고 디지털 드로잉을 조금 배워두면 학습지에 간단한 그림이라도 직접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신청하였다. 마침 같이 공부모임을 하는 선생님들도 함께 신청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그림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은 긍정적인 편이었다. 나는 평소 무언가를 보고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은 크게 어렵게 느끼지 않았었고 아주 예전에는 생물 과목의 특성상 칠판에 그림을 그려 수업한 적도 많았다. 그림에 대한 큰 거부감은 없었다. 다만 어릴 적 학창 시절 미술시간 중에 유독 상상화 그리기 시간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자유롭게 자신이 상상하는 것을 그려보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고 어려워했던 적이 있었다.


이틀 간의 연수에서 시작은 굵은 선만으로 화분을 그려보는 것이었다. 연수 교재에 표현된 화분 그림이 있어 나는 거의 그대로 그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화분 속의 식물들을 그렸다. 첫 순서라 그림 자체는 간단하고 어렵지 않은 것이었지만 나는 보지 않은 것을 상상하여 그린다는 것이 어려웠다.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화분을 그린 이들이 놀라웠다.


조금씩 조금씩 다른 과제들이 주어졌다. 10번의 브러시 이내로 사물 그리기, 간단한 사물 그리고 채색하기, 레이어로 그리기 등 디지털 드로잉의 기초적인 기능을 배워나가는 과정은 어렵지 않게 따라 할 수 있었다. 각 과정의 결과물은 바로 캡처하여 패들렛*에 게시하여 공유하였고 모든 연수생의 결과물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그림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선생님이 하나씩 언급할 때마다 여기저기 감탄과 칭찬이 이어졌다. 누가 봐도 내 그림은 초보 수준이다. 칭찬받는 사람들의 그림 실력이 부러웠다.


연수 첫째 날이 끝나고 둘째 날이 되니 난이도가 높아졌다. 첫 과제는 눈코 입이 없는 유령 같은 캐릭터 안에 표정을 그려 넣는 것이다. '오, 헐, 대박, 즐거워, 죽겠다, 망했어, 짜증 나, 미친 거 아냐?' 등의 단어가 제시되었다. 나는 정말이지 전혀 그려 넣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패들렛에 올라온 다른 이들의 그림은 정말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떻게 저렇게 표현하지? 와 진짜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고 전혀 그리지 못한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자꾸만 자신감이 없어져갔다. 나는 그 교실에서 가장 못하는 학생이었다. 과제가 주어지고 함께 결과를 공유할 때마다 '나도 칭찬받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함께 온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끄러웠다. 점점 칭찬받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뭔가 잘한다고 칭찬받지 못하니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얼른 연수가 끝났으면 싶었다.


마지막 과제는 나를 완전히 무너지게 했다. 주제는 사자성어를 난센스 그림으로 표현하기. 예를 들어 '오리무중'이면 무를 그리고 그 속에 오리를 그리는 것이다. 각자 자신이 고른 사자성어를 난센스 그림으로 표현해서 공유하면 다른 이들의 그림이 무엇인지 맞히는 방식이었다. 사자성어를 고르는 것부터 고민이 되었다. 네이버 사자성어를 검색해보고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을 만한 게 무엇일까 찾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나는 그나마 쉬울 것이라 생각하여 '온고지신'을 선택하였다. 이제 난센스 그림으로 표현해야 한다.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흐릿하게 생겨났지만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펜을 대고 시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대고 있으니 강사 선생님이 다가와 힌트를 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힌트일 뿐 내 아이디어는 아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그리기는 싫다. 또 그린다 하더라도 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결국에는 하기 싫어졌다. '나 안 할래'라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생겨났다.


같이 온 선생님들 보기가 부끄러웠다. 못하는 학생으로 보이는 것이 싫고 견디기 힘들었다. 서로서로 칭찬하며 즐거워하는 그 교실의 분위기가 너무 차갑고 어둡게 느껴졌다.




책 속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필자는 현행 수업의 가장 큰 문제점이 '학급당 아이 수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거의 모든 학급에 학습을 제대로 성취한 아이군(群 무리 군)과 학습을 불완전하게 하거나 실패한 아이군의 양군으로 분열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서에서는 편의상 전자를 A군(群)으로, 후자를 B군(群)으로 약칭하기로 하겠습니다.
  B군이란 지적 장애가 없는 보통의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학습을 불완전하게 하거나 실패하는 아이들입니다. B군 아이들은 그들이 속하는 학습 사회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날마다 당당하게 발표하고, 칭찬받고, 기뻐하는 A군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실망하며 365일을 열등감, 차별감, 소외감의 오한에 떨며, 재미도 희망도 없는 나날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학교에 오는 것이 마치 학교의 규칙을 지키고, 교실을 청소하고, 급식을 먹기 위해서 학교에 오는 것 같다고 여기고 있을까 우려됩니다. 그들은 누구로부터 인정받지도, 주목받지도 못하는 초라한 자신을 한심스러워하고 있지 않을까요. 현재의 교실은 물리적으로는 밝고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들에게는 어둡고 차가운 심리적 공간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참여하는 수업에는 법칙이 있다(한형식) 중에서


그 연수에서 나는 철저히 B군이 되었다. 그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경험했다. 한 번 두 번 이런 경험이 쌓여 결국 자존감, 자아 효능감이 낮아지고, '나 안 할래'라는 마음으로 가득 차 교실에서 엎드리고만 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이런 마음이었구나.. 그간 내 교실에서의 이런 학생들이 떠올라 너무 마음이 아팠다.


누가 봐도 나는 못하는 학생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한 두 번 칭찬받는 것은 전혀 기쁨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내가 잘할 수 있는 다른 분야가 있다는 것과 같이 온 다른 선생님들이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 하나라도 자신이 주목받을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하다. 낮아지는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 아이들을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교사,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알 수 있도록 일깨워 주는 교사, 나아가 배움에 느린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

이 아이들은 공부하기를 싫어하지만,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지식을 아는 것을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지식을 알고자 절실히 소망하고 있으며 알고자 하는 기본 욕구, 곧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수업이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게 이루어진 탓에 그들은 학습부진아로 만들어진 것뿐입니다.

- 모두가 참여하는 수업에는 법칙이 있다(한형식) 중에서

수업을 통해서 자신이 가치 있음을, 초라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 패들렛은 온라인 포스트잇 같은 것으로 하나의 창에 여러 사람이 게시하면 모두 같이 게시물을 볼 수 있다. 교실 수업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온라인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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