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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냇물 Apr 19. 2022

요즘 관심이 높아진 KIA & MIA

KIA는 일반적으로 기아차 또는 기아야구팀을 의미하거나 지칭하지만 다른 의미로도 사용된다.

 

KIA는 kill in action, 작전중 사망한 군인 즉 전사자를 의미하는 군사용어이다. MIA는 missing in action, 실종된 군인 즉 실종자를 의미한다.     

 

전쟁 없는 세상을 원하지만 역사가 반증한다.  KIA & MIA 없는 전쟁도 비현실적인 희망사항이다. 극한 상황의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행방이 불명하거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실종자도 많다. 6.25 전쟁 시 한국군은 전사 137,899, 실종 24,495명이었다.     


실종자의 경우 사망 후 유해 미수습, 적국에 포로, 전장 이탈의 경우가 있어, 전사자로 인정받고 예우를 받는 데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적용받는다.      


요즘 KIA & MIA 관련 외신 보도도 많아졌고, 우리 군내에서 의미 있는 활동도 있어 소개한다.     


한창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정부는 며칠 전 러시아에게 흥미 있는 제안을 했다. 전장에서 수습된 러시아 군인들의 사체를 돌려줄 것이며, 인수를 희망하는 그들의 어머니들에게 각종 편의까지 제공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일종의 심리전 성격의 제안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도적 명분은 있고 러시아가 호응한다면 이루어질 공산이 있었다. 애써 못 들은 척하는 푸틴은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이고, 전장에 자식을 보내고 소식을 모르는 러시아 어머니들은 애가 탈 것이다.    

 

한편, 지난 411일 철원군 비무장지대 백마고지 조망대에서 ‘2022년 백마고지 유해발굴 작전 출정식이 있었다. 작년도 인접한 화살머리 고지에서 성과 있게 임무를 수행한 뒤 두 번째 작전이다.     


화살머리 고지에서는 22구의 유해와 8,262점의 유품을 발견하였고, () 김일수 조응성 하사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백마고지 TF 에는 국방부 유해발굴단 요원을 포함 500여 명이 참여한다. 올해가 백마고지 전투 70주년이 되는 해라 더욱 뜻깊은 일이다.


70년이 아니라 100년이 넘더라도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끝까지 찾고, 최선을 다해 유해를 수습해서 부모형제에게 안겨드리고 명예롭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는 게 국가의 책무이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106일부터 15일까지 국군 9사단과 중공군 간 열흘 동안 12차례 공방전을 벌렸고, 기간 중 27만 발의 포탄과 745회의 UN군 항공기 폭격이 있었다.


포탄사격으로 고지가 민둥산이 되었고, 하얀 재가 쌓여있는 모습이 백마 같다해서 백마고지로 이름 붙여졌다. 고지 정상 주인이 일곱 번 바꾸었으나 9사단은 결국 고지를 사수하였고, 그런 연유로 9사단은 백마부대로 불린다.      

이 전투에서 전사자가 505, 실종자가 391명이나 발생했는데 유해를 찾지 못한 그 실종자가 이번 발굴 대상이다. 한 분이라도 더 많이 찾아서, 신원을 확인 후 부모형제 품으로 보내고, 국가가 최고의 예우로서 국립묘지에 모셔야 하는 게 도리다.     


우리 군도 참전자 유해 발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국방부 유해발굴단(부대)을 만들어서 전문적 역량을 갖추고 매년 전국의 현지 부대들과 협조해서 유해발굴 활동을 한다. 부대 위치는 서울 현충원 경내에 있으며 그 기량도 세계적 수준이다.      


DNA 검사로 유족 확인이 가능하다. 6.25 전쟁 참전자 중 유해 수습이 안된 분들의 자손이 계시면 등록을 해놓아야 발굴된 유해와 일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간단한 혈액검사만 받으면 된다. 전자 유가족들의 호응을 기대한다.


유가족의 마음을 담은 편지 글 하나를 소개한다.     


당신을 기다리며 보낸 세월

                          6·25 전사자 성복환 일병의 아내 김차희

 

내게 남겨진 것은 당신의 사진 한 장뿐입니다.

뒤돌아보면 그 가혹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스무 살에 결혼하여 미처

신혼살림을 차리지 못하고,

큰 댁에 머물면서 지내던 어느 날

전쟁과 함께 학도병으로 징집된 후,  

상주 상산초등학교서 잠시 머물면서

군인들 인파 속에 고향을 지나면서도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는 그 심정 어찌하였을까요?

 

전장의 동료에게 전해 받은 쪽지 한 장뿐,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떠난 후  

몇 달 만에 받은 전사 통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지요.  

 

어느 때는 연금 타러 오라는 통지를 받고도

며칠을 마음 아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흔적을 찾으려 국립묘지에 갈 때마다, 

회색 비석들이 군복을 입은 군인들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어떤 이가 국립묘지에 구경하러 간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젊은 청춘을 바친 무덤을 보고

어찌 구경하러 간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소망이 있다면

당신의 유해가 발굴되어  

국립묘지에 함께 묻히고 싶은 것뿐입니다.  

 

내게 남겨진 것은

젊은 시절의 당신의 증명사진 하나뿐인데  

그 사진을 품고 가면 구순이 훌쩍 넘은 내 모습 보고

당신이 놀라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난 아직도 당신을 만날 날만을 기다립니다.      


* 성복환 일병은 1950810일 학도병으로 입대 후 같은 해 1013일 백천지구 전투 중 전사하였고, 현재까지 유해를 수습하지 못해 국립 서울 현충원에 위패로 모셔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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