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이야기
술은 오랫동안 단순한 음료 그 이상으로 기능해왔다. 그것은 사회적 연결의 매개이고, 긴장을 푸는 장치이며, 외로움을 달래는 친구였고, 감정을 잠재우는 무기였다. 따라서 금주란 단순히 어떤 행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그 행동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다시 채우는 심리적 과업이다. 빈자리는 언제나 불안하다. 그 빈자리를 감당하고 견디는 과정, 그것이 금주의 본질이다.
사실 술은 문제가 아니다. 술은 종종 삶에 즐거움을 준다. 문제는 술 때문에 나를 잃어 버릴 때 발생한다. 그 순간 금주의 결단이 일어난다.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절박함. 그러나 금주는 그 결단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결단은 불안의 절정에서 터져나오는 의지의 불꽃이지만 너무 쉽게 꺼진다. 금주는 이 꺼져가는 불꽃을 붙잡기 위한 전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자신을 비난하거나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술을 통해 피하고 싶었던 감정, 외면했던 진실, 마주하지 못했던 상처들을 비로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금주는 시작된다.
술은 ‘회피의 언어’다.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을 때, 술은 그것을 대신 말해주었고, 때로는 완전히 잠재워 주었다. 그래서 금주란 자신이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말하기 시작하는 일이다. 그것은 고통을 인정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감싸 안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 순간부터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금주는 감정과 재회하는 길이며 그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이다.
술에 의존했던 시간들은 종종 ‘감정을 다룰 언어가 없던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금주란 언어를 회복하는 일이다. 분노가 있었지만 표현하지 못했고, 외로움이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으며, 수치심이 있었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감정은 언어를 얻지 못한 채 몸에 쌓여 있었고, 그 억압의 결과로 술은 도피처가 되었다. 금주를 결심한 순간부터 그 억압된 감정들에 언어를 부여하는 일이 시작된다. 그것은 삶을 다시 서술하는 작업이며, 존재에 대한 서사의 복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금주는 '말해지지 않은 삶'을 말로 옮기는 가장 근본적인 회복의 시작이다.
그러나 금주는 혼자 이루어질 수 없다. 술을 포기하는 일은 자신이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는 여전히 술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한다. 많은 관계는 술이라는 매개 없이는 지속되기 어려운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주는 이 관계들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관계는 진짜인가, 아니면 술을 통해 유지되는 허상인가. 금주는 단절이 아니라 더 진실한 관계를 향한 시도여야 한다. 그것은 감정을 술 없이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의 재구성이다. 그래서 금주는 관계적 전환의 계기다.
중독은 단지 물질에 대한 의존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의존이기도 하다. 술은 나름의 의미를 제공해준다. 무너질 수 있는 공간,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허용, 도피를 통한 생존. 금주란 이 모든 의미를 상실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따라서 금주의 고통은 단순한 금단증상이 아니라 삶에서의 의미 상실이다. 이것이 곧 우울과 혼란, 불안으로 이어진다. 금주는 그 상실된 의미를 대체할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것은 창조적 삶을 향한 전환이며 새로운 가치체계를 다시 쓰는 일이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괜찮은 삶이 있다는 가능성을 자기 내부에서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금주의 완성이다.
금주는 결코 직선적이지 않다. 그것은 퇴행과 전진, 좌절과 성취, 후회와 희망이 얽힌 나선형의 과정이다. 어느 날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지만, 어떤 날은 너무 힘들어 다시 술이 생각난다. 금주는 실패를 죄책감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요구한다. 다시 마셨다는 것은 잠시 흔들렸다는 신호일 뿐, 인생 전체가 무너졌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며, 변화는 언제나 느리고 불완전하다. 금주란 바로 그 느림과 불완전성을 견디는 훈련이다.
무엇보다도 금주는 자기 자신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이전의 자신은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술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새로운 자신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감싸는 방식을 배운다. 그 과정은 스스로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더 이상 ‘왜 이 정도도 못하냐’고 채찍질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믿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자비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금주는 자기에 대한 새로운 신뢰를 형성하는 훈련이며 삶의 태도 전체를 바꾸는 깊은 전환이다.
이처럼 금주는 단순한 ‘그만두기’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재구성하는 심리적이고 존재론적인 여정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무언가를 되찾는 일이다. 감정의 언어, 관계의 진실성, 존재의 의미,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이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될 때, 술 없는 삶은 견디는 삶이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금주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선택이 된다. 그것은 회복이 아니라, 다시 태어남에 가까운 심리적 재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