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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an 04. 2023

내 안의 노란 새가 날개를 펴기까지

<데미안>을 읽고



#데미안 #헤르만헤세



유년은 나에게 무척 길었다. 그것은 생물학적 나이를 먹는다고, 사는 공간이 분리된다고 저절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p.26)에 나는 오랜 시간 의지했다. 부모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해내면 그분들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남들이 흔히 가는 '정상적인' 길에 안착하는 것. 해가 지날 때마다 주어지는 과업에ㅡ대학에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ㅡ 맞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당시에는 '환하고 밝은 세계'가 나의 전부였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경험했던 각성의 시간은 뒤늦게 찾아왔다. 고작 세 살이었던 첫째와 신생아 둘째. 몸과 마음의 모든 에너지를 갈아 넣어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나'라는 사람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더는 이름 세 글자로 불리지 않았고, ㅇㅇ엄마 또는 아내와 며느리라는 역할 안에서 유령처럼 부유했다. 육아서가 말하는 '좋은 엄마' 이미지를 견딜 수 없어, 결이 다른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을 머리에 잘 담고 싶다는 욕망에 하나 둘 글을 썼다. 나의 감정과 욕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돌 하나가 우물 안에 던져졌'(p.44)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진정 원하는 걸 온전히 느끼고 따라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소리를 지르며 싸웠고, 안온한 '기둥'에서 몸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많은 눈물과 심한 몸살을 겪었다. 세상의 기준과 내가 나이기 위해 공부하는 페미니즘 사이에도 분명한 괴리가 있었다. 가부장제가 잘 꾸며놓은 '아름다운' 중산층 가정에서의 내 역할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마찰을 피할 수가 없었다. 어떨 때는 한없이 외로워졌다. 내 삶에 등장했던 데미안들이 없었다면, 그저 주저앉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데미안은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혜진 작가님은 내 안에 노란색 새가 있다는 걸 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오소희 작가님은 새에게 알껍데기를 부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감각하게 해주었다. 홍승은 작가님은 나의 매가 머리를 불쑥 내밀고 세계의 껍데기를 짓부수는데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서로 몹시 다르지만 나를 나만큼 잘 아는 친구 N, 웹진 아주마스를 함께 하는 라마와 엘라, 부너미 쌤들. 그 외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의 노란색 매는 땅덩이에서 나와 대담하게 날개를 푸드덕 거리기 시작했다.


노란 새가 날개를 펴기까지 가장 '기분 좋았던 것은, 나 자신 속에서 앞으로 나아감이었다. 나 자신의 꿈, 생각, 예감에 대한 커가는 신뢰였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힘에 대한 늘어나는 앎이었다.'(p.163) 꾸준하게 이어나갈 수 있는 끈기와 성실함은 나의 가장 큰 장점이다. 나는 예민하게 알아차리면서도, 다정하고 섬세하게 돌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동시에 타인과의 정서적 교감을 필요로 하고, 거기서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잘 알게 되니 나를 더 믿게 되고,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는 나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카인의 표적'을 갖고 있었다. 카인의 표적이란 무엇일까. 세상의 '정상적' 기준에 몸을 편안히 누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진 고유함이 아닐까. 한 번쯤은 자기 안으로 침잠하여, 자신의 꿈, 생각, 예감에 대해 절실하게 곱씹어 본 사람들. 불확실한 미래에서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고민하며 기꺼이 살아내는 사람들. 어쩌면 나에게도 그 표적이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였다.




#민음사 #트레바리 #이참에읽자 #독서 #서평 #북스타그램 #대체텍스트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회색 천 위에 책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 위에 솔방울이 하나, 책 오른쪽에 솔방울이 하나 놓여 있다. 책 표지 위쪽 절반은 헤르만 헤세의 옆얼굴을 찍은 사진이 들어가 있다. 책 표지 아래쪽 절반은 흰색이고, '세계문학전집 44' '데미안 Demian' '헤르만 헤세 · 전영애 옮김'이 쓰여 있다. 책 표지 좌측 하단에는 출판사 이름인 '민음사'가 있다. 사진 왼쪽에서 햇빛이 비쳐서 오른쪽으로 살짝 그림자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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