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요즘 악의(惡意)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주로 악성 민원인의 전화를 끊고 난 다음이었다. 모든 민원인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전화 받는 사람을 모욕한다. 며칠 전 나에게 전화했던 민원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회사 다른 여자 직원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직원은 업무 처리가 아주 능숙하고 빠르더라. 그런데 너는 왜 업무를 그딴 식으로 밖에 못하니?"
"내가 널 딸처럼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나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내가 말하는 걸 잘 좀 들어봐. 너희 부모님이 널 그렇게 키웠니?"
"너희 이사 이름하고 전화번호 다 알아 놨어. 아니다, 바로 사장한테 찾아갈 테니 그렇게 알아."
각종 협박을 삼십 분 남짓 들으니 진이 빠졌다. 누가 나를 주먹으로 때린 게 아닌데도,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할까 하는 모멸감과, 민원인이 퍼부은 악의에 대한 분노로 마음이 꽉 차 있었다. 세상에서 친절이나 배려 따위는 모두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온전치 않은 마음 상태로 집에 가면, 아이들을 안정적으로 돌보기가 힘들다. 예전에 악성 민원인에게 시달린 후 아무 처치 없이 집에 갔던 날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했던 사소한 실수에도 격하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고, 잠들기 전까지 다섯 번 넘게 울었다.
그 때 나는 느꼈다. 마음에 응급처치를 하고 집에 가야겠구나. 하지만 아이들 하원을 담당해주시는 부모님과 바통 터치를 해야 했기에, 집에 도착하는 시각을 늦출 수는 없었다.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본 끝에 나는 '특별한' 책들을 보는 방법을 택했다. 이 '특별한' 책 중에 정세랑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가 있다.
『시선으로부터,』는 주인공 시선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다. 시선 사후 10주기를 맞아, 가족들 모두 하와이에 모여 처음으로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에는 내가 사랑하는 요소가 정말 많다. 전통적인 제사 음식 대신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을 수집하여 제사상을 차린다는 계획부터 마음에 쏙 든다. 디제이(DJ)·고고학자·광고회사 이사·크리처 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도 매력적이다.
나는 다채롭게 반짝이는 등장인물 중에서도 애방과 지수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특히 좋아한다. 내가 '특별한' 책이 필요할 때마다 펼치는 장면이기도 하다.
애방은 시선이 유럽에 머물 당시 만난 친구다. 당시 시선은 유명 화가인 마티어스 마우어의 집에서 학대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우어는 시선에게 붓 정리부터 쥐약 놓기까지 온갖 잡일을 시켰고, 욕설을 퍼부으며 물건을 던졌다. 시선의 전시회에 걸린 그림을 모두 사서, 파티에서 불태우고 찢으며 조롱했다. 시선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은 시선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시선의 배신으로 상처 받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버렸다.
시선은 마우어의 지독한 악의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의 곁에는 친구 애방이 있었다. 애방은 '재능 있는 화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아시아 마녀'(p.178)라며 비난받는 시선을 자기 집에 숨겼다. 애방은 자신의 재력과 인맥을 활용해 귀국한 시선을 한국 예술계에 안착시켰다.
지수와 우윤은 둘 다 시선의 손녀로 사촌 관계다. 우윤은 어릴 때 많이 아팠다. 대학병원을 꽤 오랫동안 오갔다. 질병의 고통에 희망을 놓고 싶었을 때, 우윤의 삶에 지수가 걸어 들어왔다. 지수는 우윤과 디즈니월드에 가기로 허락받았다며, 매주 찾아와 같이 계획을 짰다. 어떤 놀이기구를 먼저 탈지,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는 어디서 볼지 노트에 꼼꼼히 적었다.
매주 찾아왔던 지수 덕분에 우윤은 외롭고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지수가 오지 않는 날에는 노트를 보면서 질병의 고통을 견뎠다. 이제 스무 살이 넘은 우윤은 '언니가 나를 구했지.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했지.'(p.148)라고 회상한다.
시선에 대한 애방의 선의는 타지에서 만난 고국 사람에 대한 친절 그 이상이었다. 귀국 시기를 늦춰가며 시선의 목숨을 구했고 '일종의 매니저처럼 커리어를 만들어냈다.'(p.180) 우윤에 대한 지수의 선의도 마찬가지였다. 지수는 평소 계획적이거나 주도 면밀한 구석이 없다. 그 때의 노력은 오직 우윤을 살리기 위한 선의로 짜낸 예외적인 노력이었다.
내가 현실에서 마주치는 사나운 악의에는 끈적끈적한 속성이 있는지, 한 번 마음에 엉겨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재빨리 이 '특별한' 책을 펼치고 애방과 지수를 부른다. 내가 만약 시선과 우윤이었다면 애방과 지수가 나에게 베풀었을 선의를 상상한다.
악의를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내 앞에 애방이 웃으며 멈춰서는 모습을 그려본다. 비스듬히 모자를 쓰고 눈을 반짝이는 당당하고 멋스러운 여인. 애방은 나에게 손을 내민다. 그 단단한 손에서 내가 아끼는 당신을 위해서 아낌없이 베풀겠다는 따듯함이 느껴진다.
애방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고 나면, 내 앞에는 지수가 있다. 넘치는 에너지와 섬세한 배려심을 동시에 가진 그는 나와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음악을 틀어준다. 어쩌면 다음 공연에 디제잉할 리스트를 나에게만 몰래 먼저 들려줄지도 모른다. 지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에게도 어느새 그의 밝은 에너지가 전해진다.
『시선으로부터,』를 한 장 한 장 넘겨갈 때마다, 독한 악의에 절망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세상에 분명 선의가 있다는 따스한 믿음이 기운을 북돋워준다. 지하철이 집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회사를 나설 때보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나는 '특별한' 책에 도움을 받아 악의에 지지 않으려 애쓴다.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p.331)
시선의 가족들은 시선이 남기고 간 조각을 되새기며 제사를 마친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내 안에도 정세랑 작가가 남긴 조각이 있음을 느낀다. 세상이 악의로만 가득 차 있는 게 아니라는 희망, 그저 선의로 친밀감을 표시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는 믿음. 독한 악의가 쏟아지는 순간에도 내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런 아름다움이다.